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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시랜드 공국, 그 정체는 무엇인가?

2007년 1월 8일, 영국의 한 일간지에 황당한 광고 하나가 게재되는데, 사생활 보장과 지위 승격!을 내건 파격적인 내용의 이 광고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매우 황당하고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이 광고에 실린 판매 물품 때문이었다. 신문에 실린 판매 물품의 이름은 ‘시랜드(Sealand)’,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시랜드’가 군주제 국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광고 문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 돈 약 45,000원을 내면 ‘시랜드 공국(The Principality of Sealand)’에서 인정하는 백작신분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광고 내용으로 인해 이 광고 한 장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분위기로 인해 언론에서도 ‘시랜드 공국’에 실체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당시 광고에 표시된 ‘시랜드 공국’은 북위 51° 53’ 40’’ 동경 1° 28’ 57’’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위치는 에식스 주의 ‘하리치항’으로부터 11km 떨어져 있는 바다 위였다. 이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영해에서 포착되는 섬을 위주로 샅샅이 뒤졌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정말로 ‘시랜드 공국’으로 추정되는 조그마한 뭔가가 포착됐다. 언뜻 보기에 섬처럼 보인 ‘시랜드 공국’은 사실 2개의 원통형 구조물이 영토를 대신하는 플랫폼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위에 주거가 가능한 건물 & 헬리콥터 착륙장을 건설한 뒤 국기를 세워놓은 약 166평 정도의 구조물이었다. 그곳에는 당시 2명의 군인과 공작 1명 그리고 백작 1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시랜드 공국'에는 통치자까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패디 로이 베이츠’였다. 그러면 이 시랜드 공국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시랜드 공국’의 탄생배경은 1942년 시작된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영국,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동부해안에 해상벙커를 설치하였는데, 이 해상벙커에는 150~300명 정도의 병력이 상시 거주하며 작전에 합류했었다. 이렇게 이 해상벙커는 전쟁의 요새로 쓰이다가 1945년 종전이 되자 그 기능을 잃고 버려졌다. 헌데 22년 뒤에 ‘패디 로이 베이츠’가 사람들 앞에서 이 해상벙커를 ‘시랜드’라고 명명한 뒤 한 나라로서 독립한다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한것이다. ‘패디 로이 베이츠’는 해상 벙커가 만들어질 당시에 영국에 육군 소령이었다. 그런데 전역을 하고 라디오 해적 방송을 운영하고 있던 ‘패디 로이 베이츠’는 어느 날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해상벙커를 생각하게된다. 그리고 그는 이 해상벙커가 영국령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해상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영국 법적으로 규제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영국 해군이 지어 이용했었던 해상벙커를 ‘시랜드 공국’이라고 명명한 뒤, 자신 스스로 ‘시랜드 공국’의 통치자라 정한 것이다. 그리고 ‘패디 로이 베이츠’자신의 신분을 공작으로 바꾼 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였다. 그리고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시랜드 공국'의 백성으로 두었던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시랜드 공국'에 건물을 살펴보면 10여 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있는데, ‘시랜드 공국’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시랜드 공국'의 신분증이 발행되어 있으며, 신분증이 발급된 사람들은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화폐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우표로 외부와 간단한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인은 ‘시랜드 공국’에 출입 시 반드시 여권확인을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었는데, 만약 위의 규제를 어길 시에는 이에 합당한 처분이 주어진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은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선발하여 독립국으로서 의지를 다지는 등 한 나라로서 갖춰야 할 조건들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어느 날, 영국 해군이 해상벙커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랜드 공국’ 사람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영군 해군에게 총알이 날라온다. 당시 ‘시랜드 공국’의 경비를 섰던 '패디 로이 베이츠'의 아들인 '마이클'이 영국 해군을 발견하고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영국 해군은 ‘시랜드 공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 한 뒤 '시랜드 공국'의 사람들을 강제퇴거 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영국해군의 생각되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랜드는 영국 영해 밖 공해에 있기 때문에 영국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다.”라며 영국 법정에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 지도 어디에도 ‘시랜드 공국’은 표기되지 않는다. ‘시랜드 공화국’ 사람들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시랜드 공화국’은 세계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한 나라가 없다. 즉, ‘시랜드 공화국’은 현재 존재하지만 국가로는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랜드 공국’에서는 황당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8년 독일 출신의 사업가가 ‘시랜드 공국’을 방문했다가 마음대로 '시랜드 공국'을 검거(점령)한 것이다. 이에 시랜드 국민 전체가 합심하여 그들을 제압한 뒤 사업가를 붙잡아 포로로 선포한다. 그리고나서 '시랜드 공화국'은 독일과 포로 협상을 벌였다. '시랜드 공국'에서는 이 사건을 ‘외자의 난’이라 칭하는데 이 일은 ‘시랜드 공국’ 역사에서 중요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패디 로이 베이츠’는 아들 ‘마이클’에게 통치권을 승계한 뒤 ‘시랜드 공국’을 떠나버렸다. 한편, 마이클은 국민들에게 ‘시랜드 공화국’의 발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은 영국과 영해권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싸움이 계속되어 마찰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시랜드 공화국’에서 발행된 여권이 범죄자들에게 이용되는데,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시랜드’의 존재가 엄청난 문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영국과의 대립은이 빈번해지자 ‘시랜드 공국’의 국민들은 '시랜드 공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6년에는 ‘시랜드 공국’에 전기를 공급하는 기계에 불이나 국민들 중 일부가 사망했으며, 지금은 경제적 문제로 힘들어져 통치자와 단 한 명의 백작만 남아있는 상태다. 계속된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자 2007년, ‘시랜드 공국’은 결국 약 1,200억 원에 '시랜드 공화국'을 판매 물품으로 내놓았다. 이에 실제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이 ‘시랜드 공화국’을 사려하였는데, 교통수단이 불편하다고 접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래를 취소한바 있다. 아직도 ‘시랜드 공국’은 자기네 정부가 승인한 신분 작위를 판매하고 있으며 ‘시랜드 공국’을 매입 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