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진시황제 무덤과 병마용갱!!

1974년 중국 산시성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을 본 떠 만든 인형과 창, 청동화살, 석궁의 촉 등이었다. 이것을 본 한 일간지 기자가 이 상황을 신문에 실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의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사람 형체의 인형이 발견된 곳으로 발굴팀을 급파했고 파견된 고고학 발굴팀은 도착하자마자 대대적인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뒤, 발굴팀은 6m 깊이의 땅속에서 벽돌바닥 위에 줄지어 서 있는 지하군단을 발굴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군단은 병사들만 서있는 보병, 전차와 병사가 함께 있는 기병군단이 섞여있었는데 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는 병사들이 3~4명씩 타있었으며 그 뒤에는 보병이 12명씩 서있었다. 그것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기원전 246년 13세의 나이에 진나라 왕위에 올라 23세에 실권을 잡았으며 26세에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에 당시 통치제제였던 봉건제를 중앙집권제로 바꾸고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철권통치를 일삼았다. 이때 봉건제도를 뒷받침했던 유교 철학을 철폐하기 위해 유학서적을 전부 불태우고 460명의 유학자를 생매장하는 ‘분서갱유사건’을 일으키는 등 악명을 떨친 전제군주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중국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여겨지는데 이 이유는 진시황의 엄청난 치적 때문이었다. 그는 성문법을 만들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다. 또한 진시황은 글자를 통일함으로서 넓은 영토 어디에서도 뜻이 통하게 했고 식량과 물자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하고 운하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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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진시황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건축물을 많이 지었는데,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 불리는 만리장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도록 했는데, 이것은 사후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진짜 묘는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만들게 하였으며 사후에는 가묘를 만들어 자신의 진짜 묘를 찾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것에 관련된 사람들을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생매장했다. 그래서 옥수수밭에 지나지 않던 곳에서 거대한 병마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흥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1976년 4월, 처음 발견된 무덤으로부터 약 20m 근처에서 2,000여 명의 병사와 89대의 전차, 청동 병기 수만 점이 나온 ‘병마용갱’이 또 하나 발견된다. 그리고 한 달 뒤, 지휘부 군영을 재현한 ‘제3호 용갱’이 추가로 발견되는데 학계에서는 특히 이 ‘제3호 용갱’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제3호 용갱’은 그동안 비밀에 쌓여있던 진시황의 군사 포진도 즉,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당시 그의 강력한 군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 무덤 그 자체가 커다란 하나의 군사 박물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시황에 대해 연구하던 학자들이 뜻밖의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진시황이 우주에 광적인 집착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진시황 무덤의 축조 기술을 살피던 학자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이 전체적으로 ‘돌아올 회’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건축물의 공간배치가 천체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살았던 ‘아방궁’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아방궁’이란 중국 진시황이 세운 궁전으로 약 900개의 방이 있어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라고 전해지는 궁전인데 학자들이 이 아방궁터를 하늘의 별자리와 비교하면 아방궁의 공간배치는 하늘의 별자리와 대응했고 황제가 머물렀던 ‘자미궁’은 북두칠성자리에 그리고 아방궁 안에 있던 ‘위수’는 은하수자리에 북쪽에 있는 나머지 궁전은 페가수스 두 별자리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일본의 한 연구단체는 진시황의 우주에 대한 관심은 이상한 믿음에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직후 자기 자신 스스로 신선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한 도인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 그 도인으로부터 ‘사람을 대할 때 생기는 사악한 기를 피하라(인주 미행 체중 사기 피)’는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진시황은 호위무사에게 신하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시황의 거처를 알아내고 신하들이 찾아오자 매우 분노한 진시황은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전부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진시황이 더욱 심하게 자신이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믿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자신의 호칭을 바꾼 것이었다. 그동안 ‘왕’이라고 불렸던 것을 금지시키고 ‘황제’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이때 황제의 ‘황’은 천제, 즉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었다. 또한 학자들은 주장의 근거로 <사기>와 같은 중국의 문헌들을 제시했는데 이 문헌들의 기록에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진시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 여겼음은 물론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형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또한 고고학자 ‘크라피바’ 박사는 기록 중 진시황의 청동거울을 언급하며 이때부터 진시황이 우주, 외계를 광적으로 맹신했다고 주장했다. 청동거울이란 진시황이 만든 12개의 커다란 거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청동거울을 진시황은 밤마다 달빛에 비추며 우주와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크라피바’ 박사는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외계의 계시를 받아야만 건축물을 축조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게 지어진 첫 건축물이 ‘극묘’라고 했다. ‘극’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을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은 당시 지상공간을 천상세계와 명확하게 대응시키는 새 궁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극묘’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때, 기적의 삼발이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기적의 삼발이가 진시황의 건축물을 짓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으로 진시황의 건축물로 대표되는 아방궁과 270채의 궁전, 만리장성은 물론 거대한 자신의 무덤 역시 이 기적의 삼발이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의 삼발이는 문헌에만 기록되어 존재할 뿐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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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고대 암벽도시 페트라, 고대도시

 1812년 요르단의 사막 한 가운데 거대한 절벽 사이를 지나가는 아랍인으로 위장한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오래전 역사 속에 사라진 '고대 도시'를 찾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험난한 협곡 끝에서 사막의 암벽도시 ‘페트라’를 찾고만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기준으로 서남쪽으로 15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도시 ‘페트라’, ‘페트라’로 가기 위해서는 요르단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거대한 협곡 지대 ‘와디무집’을 지나야만 한다. 약 70m의 이 엄처난 협곡 지대는 오랜 시간동안의 지진과 침식의 결과물로, 사해로 들어가는 협곡이다. 이러한 척박한 사막에 세워진 고대 암벽도시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198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암벽도시 ‘페트라’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페트라’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고작 2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19세기, 스위스 출신의 탐험가이자, ‘아프리카내륙탐사추진협회’의 회원이었던 ‘부르크하르트’가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탐험 대신 회교도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의 탐사를 계획한다. 그렇지만 ‘아프리카내륙탐사추진협회’는 ‘부르크하르트’의 ‘메카’ 탐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서양에서 파견된 기독교인 탐험가들이 회교권을 여행하다가 살해를 당하거나 탐험을 포기하고 돌아오기 일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크하르트’는 아랍어&코란을 심히 공부하는가하면, 수염을 기르는 등 아랍인들의 생활양식을 수행하며 열심히 준비를 한다. 왜냐하면 회교도를 가장하다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들키게 되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에 감탄한 협회는 마침내 ‘부르크하르트’에게 회교권 지역 탐험을 허락한다. 이렇게 탐사를 시작하게 된 ‘부르크하르트’는 1812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던던 중 상인들로부터 고대도시 ‘페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호기심을 가진 그는 ‘페트라’를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되지만 ‘페트라’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왜냐하면 '페트라'가 외부에선 입구도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 암석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폭 2m, 길이 1.2km에 이르는 절벽 사이에 있는데, 이 길은 협곡이라는 뜻의 아랍어 ‘시크(Siq)’라고 불린다. 오랜 세월동안 지각변동으로 벌어진 바위 틈새 덕분에 ‘페트라’는 천혜의 요새가 된 것이다. 결국 이 길을 찾은 ‘부르크하르트’가 길을 통과해 ‘페트라’를 보고 매우 놀라는데, 그곳이 1,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고대도시 ‘페트라’는 주거시설, 목욕탕, 극장, 시장, 무덤, 상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인구 30,000명이 거주하던 고대 도시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페트라’의 모든 건물이 ‘조각’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건축물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인 것이다. 높이 39m, 너비 28m에 이르는 거대한 장밋빛 사암, 이 암석을 통째로 조각한 ‘알 카즈네 신전’은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것이다. ‘페트라’는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바위덩이인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 페트라’, 그럼 과연 누가 언제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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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는 향료의 수요가 높아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향료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중 아랍계 유목인 ‘나바테아인’들은 사막에서 상인활동을 하며 아라비아 일대의 무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라비아 남부의 향료나 인도의 후추 등을 아라비아 북부로 운송하던 강력한 상인 집단이었다. 활발한 활동으로 시리아와 이라크 서부 등까지 세력을 확장한 ‘나바테아인’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한다.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이자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역의 중심지에 만든 요새 도시 ‘페트라’였다. 사막을 건너다녀야 했던 상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도시 ‘페트라’는 척박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였고 난폭한 도적이나 짐승들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안전 지역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막 여행으로 지친 상인들은 모두 ‘페트라’를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었다.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를 거쳐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했다. 상품가격의 무려 25%에 달한 통행세 덕분에 ‘나바테아인’들은 점점 부를 축적해나간다. 대상무역이 활발해지고 천연의 요새라는 이점까지 갖춘 ‘페트라’는 교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무역을 하는 유목민족 ‘나바테아인’들이 어떻게 암벽에 도시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을까?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바로 천장에 난 구멍이었다. 페트라는 바위의 정면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 내리면서 공간을 만든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은 건물을 지을 바위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깍은 뒤, 그 위에 정교한 설계도를 그렸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 내려 간 것이다. ‘페트라’의 대표적인 건물인 ‘알 카즈네 신전’ 역시 바위에 윗부분에 수직으로 관통하는 구멍을 뚫어 아래로 내려가면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왜 만들었을까? ‘나바테아인’들의 삶은 바위에서 태어나 바위에서 살다가 바위에서 죽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바위자체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에게 바위 속에 매장 된다는 것은 신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죽은 사람 역시 바위를 깎아 그 안에 매장했다. 일일이 바위를 조각해 만든 ‘페트라’에 건물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 800여 개에 달하지만 이는 ‘페트라’전체의 1/4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인구 30,000명의 도시 ‘페트라’가 엄청난 인원과 시간이 소요되는 ‘페트라’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나바테아인’들이 건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페트라를 짓기 위해 이집트가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기원전 2800여 년 전부터 피라미드를 건축한 이집트의 인력과 기술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페트라’의 건물들에 붙은 이름들 때문이다. 신전 ‘알 카즈네’는 보물창고라는 뜻의 아랍어인데,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보물을 숨겨뒀다는 이야기에 근원한다. 또 다른 신전인 ‘카스르알빈트피라움’은 ‘파라오 딸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곳이 오래전부터 문화적으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페트라’의 한 가운데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 건축 양식인 탑문을 갖고 있으며 이 건물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시집간 딸을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페트라’가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지어졌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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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30,000명이 마실 식수를 어떻게 공급했냐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페트라’는 1년동에 강수량이 10~15cm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물이 부족한 지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도시 곳곳에 연결된 '수로'였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오목하게 깎아서 빗물을 저하는 곳간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물 창고가 먼 곳의 샘에서 물을 끌어들였는데, 대략 반경 25km 이내의 모든 샘물들이 이 수로를 통해 ‘페트라’의 수원으로 사용되었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물들은 각 가정의 부엌들로 이어지는 것이다. 완벽한 물 이동 통로와 암벽으로 둘러싸인 암벽 도시 ‘페트라’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속도의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세기에 접어들면서 '페트라'는 역사적 전환점에 맞딱드인다. 그것은 바로 당시 거대제국을 건설 중이던 로마에게 ‘페트라’의 존재가 거슬린 것이다. 험난한 암벽으로 막힌 천연의 요새 ‘페트라’는 난공불락이었기에 로마는 새로운 대책을고심하게 된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바로 ‘페트라’의 수로를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페트라'는 고된 식수난을 겪다가, 결국 서기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Trajanus)’황제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서기 363년과 551년 두 번의 대 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페트라’의 대부분을 망가져 버렸다. 뿐만아니라 전염병까지 돌자 거주민들은 ‘페트라’를 떠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페트라’는 서서히 붕괴되고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진 도시가 됐다. (‘페트라’의 마지막 기록은 6세기경의 파피루스 뭉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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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불가사의한 지하도시, '데린쿠유'&'마트마타'

1960년 터키 ‘카파도키아’, 도망치는 닭을 쫓던 농부가 쫓던 닭이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구멍 속으로 들어간 닭이 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농부는 닭이 들어간 구멍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농부는 구멍 안으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던 중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매우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상상조차 어려운 놀라운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계단과 이어져 있었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간 곳에는 가축을 키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물 사육장에는 또 다른 어딘가로 가는 길이 있었고 그 통로의 끝의 장소에서는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아있는 부엌이었다. 부엌에도 역시나 다른 공간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고, 그곳에는 학교, 침실, 식량창고, 교회 뿐만 아니라 감옥처럼 보이는 장소까지 발견됐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즉, 농부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지하도시’였던 것 이다. 이렇게 지하세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이 ‘지하도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지하도시’는 마치 개미집처럼 상하좌우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밑으로 20층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하도시’는 무려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후에 학자들은 이 지하도시의 이름을 터키어로 ‘깊은 우물(Derinkuyu)’이라는 뜻의 ‘데린쿠유’라고 명명하고 이 ‘지하도시’에서의 생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터키공화국이 설립되던 1923년까지 ‘데린쿠유’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했는데, 학자들은 햇빛도 전혀 없고 공기 또한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시’에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작은 환기구 구멍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지하도시’에서 발견된 환기구 구멍은 총 54개로 수직으로 파진 80m의 중심 환기구로 공기가 들어오며, 중심 환기구와 연결되어 있는 보조 환기구를 통해서 각각의 방으로 공기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낮은 층에서도 맑은 공기가 유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환기를 위해 ‘지하도시’를 수직구조로 만들어 공기가 잘 통하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축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생활공간을 조성하여 생활한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학자들은 이 ‘지하도시’는 기독교가 박해 받던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했다. 처음에는 도망쳐온 몇 명의 사람들이 지하로 들어가 생활하다가 점차 그 숫자가 많아지자 더 크고 넓은 공간을 가지기 위해 옆으로 지하로 계속 파들어 갔고 현재 지금의 복잡한 미로 형태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문을 통로마다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통로를 미로처럼 여러 갈래 뚫어 침입자가 길을 잃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13세기 칭기즈칸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에도 ‘지하도시’는 입구를 봉쇄함으로서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학자들은 ‘데린쿠유’를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난공사라고 표현하며 아무런 장비도 없이 평균 7~80m의 지하에 수 십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린쿠유’에 지하도시를 건설하려면 적어도 300여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외부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내부에 들어와도 미로 속에 갇혀 버릴 것 같은 지하도시 ‘데린쿠유’.

그리고 ‘데린쿠유’가 세상에 알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미스테리한 ‘지하세계’가 모습을 나타낸다. 1969년, 튀니지에 무려 22일 동안이나 폭우가 쏟아졌었는데, 한 남자가 자신의 마을이 물에 잠겼다며 구조요청을 한다. 이로 인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게 된 ‘지하세계’, 그것은 세계 최대의 지하마을 ‘마트마타’였다. 모습을 드러낸 ‘마트마타(Matmata)’는 거대한 웅덩이의 벽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은 특이한 형태의 마을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마을이 생긴 것이 무려 천 년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학자들은 약 7000년 전, 이 곳 사람들의 선조들이 이곳에 이주를 해 왔으며,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 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지하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땅을 거대한 우물처럼 깊게 파기 시작했고, 깊이 판 웅덩이의 벽에 인공 동굴과 같은 구멍을 파서 각각의 방을 만든 후, 그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를 파서 하나의 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집을 완성한 ‘마트마타’에 사람들은 매년 봄 마을 북쪽으로 가서 일 년치에 식량을 구해 온 뒤, 창고에 식량을 보관해 생활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하에 만들어진 마을에 비가 조금이라 많이 내리면 잠길 위험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집의 형태를 1층과 2층으로 나눠서 만들었고 1층이 잠기더라도 자신들의 식량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2층에 식량창고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이 신비로운 마을에 유난히 관심을 가졌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스타워즈에 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였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마트마타’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몇 천년 전에 지어진 지하마을이 먼 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진 영화 속 집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마트마타’는 더욱 유명해져 관광지로 발전했고 지하마을에 일부는 호텔로 운영되어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그 영화는 1977~2005년까지 시리즈물로 제작되며 미국 SF영화의 시초가 된 <스타워즈>였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스타워즈 에피소드4 - 새로운 희망’에서 주인공 ‘루크’가 살았던 집의 배경이 된 곳이 ‘마트마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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