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진시황제 무덤과 병마용갱!!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4. 19. 00:58

1974년 중국 산시성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을 본 떠 만든 인형과 창, 청동화살, 석궁의 촉 등이었다. 이것을 본 한 일간지 기자가 이 상황을 신문에 실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의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사람 형체의 인형이 발견된 곳으로 발굴팀을 급파했고 파견된 고고학 발굴팀은 도착하자마자 대대적인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뒤, 발굴팀은 6m 깊이의 땅속에서 벽돌바닥 위에 줄지어 서 있는 지하군단을 발굴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군단은 병사들만 서있는 보병, 전차와 병사가 함께 있는 기병군단이 섞여있었는데 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는 병사들이 3~4명씩 타있었으며 그 뒤에는 보병이 12명씩 서있었다. 그것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기원전 246년 13세의 나이에 진나라 왕위에 올라 23세에 실권을 잡았으며 26세에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에 당시 통치제제였던 봉건제를 중앙집권제로 바꾸고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철권통치를 일삼았다. 이때 봉건제도를 뒷받침했던 유교 철학을 철폐하기 위해 유학서적을 전부 불태우고 460명의 유학자를 생매장하는 ‘분서갱유사건’을 일으키는 등 악명을 떨친 전제군주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중국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여겨지는데 이 이유는 진시황의 엄청난 치적 때문이었다. 그는 성문법을 만들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다. 또한 진시황은 글자를 통일함으로서 넓은 영토 어디에서도 뜻이 통하게 했고 식량과 물자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하고 운하를 건설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또한 진시황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건축물을 많이 지었는데,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 불리는 만리장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도록 했는데, 이것은 사후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진짜 묘는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만들게 하였으며 사후에는 가묘를 만들어 자신의 진짜 묘를 찾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것에 관련된 사람들을 비밀 유지를 위해 모두 생매장했다. 그래서 옥수수밭에 지나지 않던 곳에서 거대한 병마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흥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1976년 4월, 처음 발견된 무덤으로부터 약 20m 근처에서 2,000여 명의 병사와 89대의 전차, 청동 병기 수만 점이 나온 ‘병마용갱’이 또 하나 발견된다. 그리고 한 달 뒤, 지휘부 군영을 재현한 ‘제3호 용갱’이 추가로 발견되는데 학계에서는 특히 이 ‘제3호 용갱’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제3호 용갱’은 그동안 비밀에 쌓여있던 진시황의 군사 포진도 즉,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당시 그의 강력한 군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 무덤 그 자체가 커다란 하나의 군사 박물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시황에 대해 연구하던 학자들이 뜻밖의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진시황이 우주에 광적인 집착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진시황 무덤의 축조 기술을 살피던 학자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이 전체적으로 ‘돌아올 회’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건축물의 공간배치가 천체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살았던 ‘아방궁’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아방궁’이란 중국 진시황이 세운 궁전으로 약 900개의 방이 있어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라고 전해지는 궁전인데 학자들이 이 아방궁터를 하늘의 별자리와 비교하면 아방궁의 공간배치는 하늘의 별자리와 대응했고 황제가 머물렀던 ‘자미궁’은 북두칠성자리에 그리고 아방궁 안에 있던 ‘위수’는 은하수자리에 북쪽에 있는 나머지 궁전은 페가수스 두 별자리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일본의 한 연구단체는 진시황의 우주에 대한 관심은 이상한 믿음에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직후 자기 자신 스스로 신선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한 도인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 그 도인으로부터 ‘사람을 대할 때 생기는 사악한 기를 피하라(인주 미행 체중 사기 피)’는 말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진시황은 호위무사에게 신하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시황의 거처를 알아내고 신하들이 찾아오자 매우 분노한 진시황은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전부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진시황이 더욱 심하게 자신이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믿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자신의 호칭을 바꾼 것이었다. 그동안 ‘왕’이라고 불렸던 것을 금지시키고 ‘황제’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이때 황제의 ‘황’은 천제, 즉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었다. 또한 학자들은 주장의 근거로 <사기>와 같은 중국의 문헌들을 제시했는데 이 문헌들의 기록에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진시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 여겼음은 물론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형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또한 고고학자 ‘크라피바’ 박사는 기록 중 진시황의 청동거울을 언급하며 이때부터 진시황이 우주, 외계를 광적으로 맹신했다고 주장했다. 청동거울이란 진시황이 만든 12개의 커다란 거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청동거울을 진시황은 밤마다 달빛에 비추며 우주와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크라피바’ 박사는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외계의 계시를 받아야만 건축물을 축조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게 지어진 첫 건축물이 ‘극묘’라고 했다. ‘극’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을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은 당시 지상공간을 천상세계와 명확하게 대응시키는 새 궁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극묘’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때, 기적의 삼발이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기적의 삼발이가 진시황의 건축물을 짓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으로 진시황의 건축물로 대표되는 아방궁과 270채의 궁전, 만리장성은 물론 거대한 자신의 무덤 역시 이 기적의 삼발이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의 삼발이는 문헌에만 기록되어 존재할 뿐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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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 네페르티티 여왕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2. 16. 23:25

1923년 하나의 보물을 두고 이집트 정부와 독일 정부, 두 나라 사이에 대립이 고조되었다. 이집트 정부의 것이니 즉각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이집트 정부와 보물이 운송과정에서 손상우려가 있다며 반환을 거부하는 독일 정부 대표 아돌프 히틀러, 이 보물은 바로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여인의 흉상이었다. 1912년 12월 6일, 이집트 나일강 인근 사막도시 아켈타톤에서 독일의 고고학팀은 이집트 정부의 허가 하에 유적을 발굴 중이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이집트 전문학자인 루트비히 보르하르트(Ludwing Borchardt)는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루트비히 보르하르트'는 이집트 출입국 관리들의 눈을 피해 흉상을 독일로 밀반출한다.(당시 흉상에 석고를 발라 몰라보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독일로 밀반출된 이 조각상은 1923년 원래 상태로 복원되어 독일 베를린 알테즈 박물관에 전시된다. 기원전 1360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지는 이 조각상은 왼쪽 눈동자가 없는 미완성 상태였지만 매우 섬세하고 정밀하게 조각되어 현대의 미인상에 견주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밝은 갈색 피부,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가늘고 긴목의 형태) 이에 이집트 예술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데, 이 흉상이 바로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이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아낙수나문(Anksnmn)과 함께 고대 이집트 3대 미녀로 꼽히는 네페르티티는 이름의 뜻 '미녀가 왔다.'를 보여주듯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4세기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10대 파라오 아크나톤(Akhnaton, 아멘호테프 4세)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였으며, 파라오 투탕카멘(이집트 제18왕조 12대 파라오, Tutankhamen)의 장모이자 양모로 알려져 있다. 또한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최초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남편인 10대 파라오 아크나톤과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만큼 엄청난 권력을 가졌었다. 그런데 기원전 1367년 홀연히 역사 속 기록에서 사라진다. 뿐만아니라 무덤, 유물, 유적 등 '네페르티티'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네페르티티'의 기록 실종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첫 번째, 아크나톤 왕 14년 이집트에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이때 '네페르티티'가 사망했다는 설.

두 번째, 아크나톤 왕이 사망하고 다음 파라오인 투탕카멘이 즉위하기 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 '스멘카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스멘카레'가 '네페르티티'라는 설.

세 번째, 기원전 1367년 '네페르티티'가 아크나톤 왕의 사랑을 잃고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설.

네 번째, 일신교(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를 도입하는 종교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치적인 이유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독일 베를린 알테즈 박물관에 공개된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은 기이하게도 왼쪽 눈동자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네페르티티' 조각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소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추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얼굴로 보였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첫 번째, 고대 이집트 궁중 조각가였던 투트모스가 '네페르티티'를 사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한을 담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미지를 섞어 만들었다는 설.

두 번째, 고대 이집트 궁중 조각가였던 투트모스가 '네페르티티'의 실제 아름다움에 자신이 만든 조각상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조각을 미완성인 상태로 남겨놓았다는 설.

세 번재, '네페르티티'조각상을 밀반출했던 '루트비히 보르하르트(Ludwing Borchardt)'가 밀반출 과정 중 훼손시켰다는 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2003년 영국 요크대학의 '조앤 플레처'교수가 놀라운 주장을 한다. 1898년 프랑스의 이집트 고고학자 '빅터 로렉'이 발견한 7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던 '젊은 여인'이라는 이름이 붙어진 미라가 발견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훼손 상태가 심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미라가 흉상과 유사하다고 느낀 '조앤 플레처'교수가 12년간 미라의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분석한 결과 미라를 싼 천이 당시 왕족들만이 사용한 고급 천이었다는 것과 최상의 약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꺽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미라의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이 있다는 점 등이 흉상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라를 복원해 '네페르티티'의 당시 얼굴을 공개하였는데 아프리카계의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많은 논란이 계속되던 2003년 8월 30일, 이집트 카이로 유물관리 위원회 사무총안 '자히 하와스'는 '조앤 플레처'교수가 '네페르티티'의 미라라고 주장한 미라에 대해서 '네페르티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대 남성의 미라라며 반박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은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했던 풍습이었으며 왕비들은 귀를 뚫지 않고 가발을 이용해서 귀걸이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6번이나 출산을 했다고 알려진 '네페르티티' 여왕이라고 하기엔 이 미라의 골반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네페르티티'는 30세 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미라는 18~30세로 추정되므로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진짜 '네페르티티'의 미라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본격화된다. 그 결과 투탕카멘, 아크나톤 등 수많은 미라들에 신원이 밝혀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페르티티'의 진짜 미라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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