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한국 토종견, 동경개(동경이)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3. 29. 08:44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견하면 떠오르는 삼총사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개가 있었다. 그서은 바로 ‘동경개’였다. 2005년 경주 서라벌대학에 재직 중이던 ‘최석규’교수, 그는 경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열람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개 모양의 33점의 토우로 그 중에서 약 50%는 꼬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호기심이 생긴 ‘최석규’교수는 조사에 들어간다. 조사결과 이 개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토종개 ‘동경개’임을 밝혀낸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우람한 체구와 잘 발달된 근육, 44~49cm의 키와 49~52cm의 길이 그리고 14~18kg의 몸무게를 가진 중형견으로 겉으로 보기엔 별로 독특할 것 없는 ‘동경개’는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천적으로 꼬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개의 꼬리는 견종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꼬리가 없는 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꼬리가 없는 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개들은 열성 유전병 증세를 보여 비정상적인 개로 분류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경개’는 대부분이 꼬리가 없음에도 그 어떤 병적 증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동경개’에 대한 기록이 담긴 최초의 문헌은 조선 현종 10년에 출간된 ‘동경잡기’로 동경에 살고 있는 꼬리 짧은 개를 ‘동경구’라 부른다고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경’은 고려시대 삼경 중 하나였던 현대의 경주를 말한다. 즉 ‘동경개’라는 명칭은 경주의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경개’의 명칭에 대한 설명이 최초로 수록된 ‘동경잡기’ 외에도 ‘동경개’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경개’라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사기 제28권 ‘백제 본기’에서도 꼬리 짧은 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는 ‘동경개’가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 살아온 토종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문헌들을 종합하면 ‘동경개’는 후각이 매우 발달했고 민첩성이 뛰어나며 영특하고 용맹스러운 기질을 가졌지만 사람에게는 온순하며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는 ‘증보문헌비보’에 나오는 ‘동경개’에의 남다른 기질에 대한 실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에 살던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동경개’와 함께 한양으로 가던 중 ‘문경새재’에서 병으로 쓰러져 죽고 만다. 그러자 ‘동경개’는 쉬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죽은 곳으로 잡아끌어 안내했다고 한다. 그리고 난 뒤 갑자기 주인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경주에서 문경새재까지 먼 거리를 쉬지도 않고 달린 탓에 기력이 다해버린 것이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와 ‘동경개’를 함께 묻어주었고 후에 무덤의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동경개의 이 같은 충성심과 영특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옛날부터 영특하고 충성스러워 선조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동경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기 시작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때문이었는데, ‘동경개’가 일본의 ‘고마이누’를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왕가나 신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조각상 ‘고마이누’(‘고마이누’는 액운을 쫓기 위해 신사 앞에 놓는 상서로운 짐승)는 예부터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이에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돼 있는 ‘동경개’와 ‘삽살개’ 등 한국에 토종개들이 ‘고마이누’를 닮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이를 참을 수 없어 ‘동경개’들을 죽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총독부 산하 ‘조선원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견피를 연간 10만 장에서 50만 장까지 수집하는 바람에 토종견들의 개체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제의 토종개 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동경개’는 꼬리가 없어 재수가 없는 개로 인식되었고 이런 잘못된 인식으로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경개’를 멀리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잡아먹히기 까지 하는 등 ‘동경개’는 멸종되기 일보직전이 된다. 그런데 이때 멸종의 위기에 다다른 ‘동경개’에게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동경개’를 살리자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동경이보존연구소’가 설립된 것이다. ‘동경이보존연구소’는 ‘동경개’를 보존하고 개체수를 늘리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정부와 지자체 역시 2008년 6월 경주개 ‘동경이’ 선포식을 시작으로 2009년 8월 경주 양동마을을 ‘동경개’ 사육 마을로 지정하는 등 ‘동경개’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리고 2010년 ‘동경개’ 역사상 큰 획이 그어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동경개’가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에 이어 ‘한국 토종견 제4호’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이제 명실상부 ‘동경개’는 ‘토종견’으로서 귀한 몸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경개’의 우수성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사냥견과 화재 경보견 등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주시는 ‘동경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posted by 멈출수없는이유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 사적1호~10호 알아보기!!

오늘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 중에서 사적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적이란 기념물 중에서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토목·교육·사회사업·분묘·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을 뜻하는데요. 현재 사적은 제1호부터 제533호까지 있는데 그 중 사적1호~10호까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사적1호 - 경주 포석정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3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신라시대 연회장소로서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5.234㎡의 면적으로 원래는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정자는 없고 물길만 남아있다. 물길은 무려 22m이며 높낮이의 차이는 5.9cm이다. 고대 중국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벚들과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이를 본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유상곡수연 :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는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셔야했던 잔치)


2. 사적2호 - 김해 봉황동 유적

 소재지 -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시대 - 청동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의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적으로,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인데, '조개더미'라고도 한다. 봉황대 언덕 인근에 시기가 서로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조개더미에서 토기, 석기, 가락바퀴, 중국 화폐인 화천, 탄화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와 다양한 무덤유적(고인돌, 옹관묘)들이 있다. 


3. 사적3호 - 수원 화성

 소재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조선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평한 평지를 따라 쌓아진 평산성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짓기 시작해 1796년(정조 20년)에 완성되었다. 수원 화성의 둘레는 약 5.7km, 높이는 4~6m에 달한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으며 거중기 등을 이용해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수원 화성 안에는 화성행궁, 내포사, 사직단, 중포사가 있었었다.(지금은 화성행궁과 내포사만 복원되어있다.) 1796년부터 현재에 오면서 성곽과 시설물들이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와 복원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4. 사적4호 - 부여 가림성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 (군사리)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백제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백제의 수도였었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보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부근에 지은 석성으로 501년(백제 동성왕 23년)에 위사좌평이었던 백가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가림성은 돌과 흙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형태는 테뫼식(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형태)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터, 남서북문터,우물터 3곳 그리고 보루(방어시설)가 남아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성곽 중 유일하게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성이다.


5. 사적5호 - 부여 부소산성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삼국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사비시대의 도성으로 성이 자리한 부소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부른다.(삼국사기에서는 사비성, 백제본기에서는 소부리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던 538년(백제 성왕 16년)에 왕궁을 지키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00년(동성왕 22년)경에 테뫼식 산성이 이미 있었던 것을 605년(무왕 6년)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그리하여 테뫼식과 포곡식이 혼합된 형태의 산성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터, 영일루, 사비루, 낙화암, 고란사 등이 남아있다. 


6. 사적6호 - 경주 황룡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경주 월성 동편에 궁궐을 짓던 중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찰(절)로 고쳐 지어지기 시작해 17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후 5m가 넘는 삼존불상을 만들고 이를 모시고자 584년(신라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지었다. 그리고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바람으로 9층 목탑을 건축하게 되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무려 93년간에 걸쳐 조성된 큰 절이었다.) 하지만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고의 침입으로 다 타버려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7. 사적7호 - 경주 망덕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신라 문무왕이나 문왕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경주 낭산 기슭에 위치한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679년(신라 문무왕 19년) 당나라가 침입을 하자 부처의 힘으로 이를 이겨내고자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당나라가 알고 사신을 보내오자 사천왕사 대신 이 절을 보여 주며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뜻에서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동서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가 남아있다. 쌍탑 가람배치 형태이다.


8. 사적8호 - 경주 사천왕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674년(신라 문무왕 14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명랑법사에게 이를 막을 계책을 구하는데, 신유림에 사천왕사라는 사찰을 지어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자고 하였다. 이에 사천왕사는 679년에 완공되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현재 남아있다.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접어들고 가장 먼저 지은 절이었다. 


9. 사적9호 - 없음


10. 사적10호 - 서울 한양도성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외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조선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한양을 둘러싼 도성으로 1395년(조선 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흙과 돌로 지은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두었다. 이후 1422년(조선 세종 4년) 흙으로 쌓은 곳을 전부 돌로 바꾸고 공격과 방어시설을 늘렸다. 그리고 1704년(조선 숙종 30년)정사각형의 돌들을 다듬어서 벽면이 수직이 되도록 쌓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면 더욱 다양한 자료들과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으니 한 번 방문하셔서 둘러보세요~~우리의 문화재는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찾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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