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롬멜의 보물, 그 행방은?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3. 30. 21:39

2007년 7월 18일, ‘테리 호지킨슨’이라는 저명한 탐험가가 놀라운 주장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라졌던 일명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에르빈 롬멜’의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육군 원수였던 ‘에르빈 롬멜’은 능수능란한 지휘로 매우 유명했다. 히틀러 최측근인 ‘요제프 괴벨스’는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게 있어 전설적인 존재라고 평가했고, 심지어 상대국이었던 영국의 수상 ‘처칠’ 또한 ‘에르빈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에르빈 롬멜’은 독일군과 연합군에게 존경의 존재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연합군의 계속된 공세로 독일군의 전선이 점점 무너지게 되자 1943년 ‘롬멜’의 전차부대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퇴각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영국의 한 방송은 튀니지의 사하라 사막에서의 전투에서 연합군이 ‘롬멜’의 부대를 전멸했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롬멜’의 정예부대가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에서 섬멸됐다는 것이 알려지자 ‘에르빈 롬멜’의 부대가 사하라 사막에 간 이유에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상당한 양의 보물들을 강탈한 ‘롬멜’과 친위대 사령관 ‘발터 라우프’(튀니지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에게 각종 진귀한 역사적 유물들과 금은보화를 약탈했으며 특히 ‘제르바 섬’의 유대인들에게서는 440파운드의 금괴와 보물들을 강탈했다.), 그들이 수탈한 보물의 양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군이 계속해서 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롬멜’은 강탈한 보물들을 튀니지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옮기려 했지만, 이미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해상까지 모두 장악했음을 알게 되자 ‘롬멜’은 정예부대에게 비밀기지에 보물들을 감출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그가 보물들을 숨기려고 한 장소가 바로 사하라 사막이었고 이로 인해 ‘롬멜’의 정예부대는 군용차 15~20대에 보물들을 싣고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그런데 정예부대가 사하라 사막의 비밀장소에 보물을 성공적으로 싣고 돌아오던 도중 연합군의 공격으로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롬멜’이 히틀러에 의해 숙청을 당하자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의 위치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섬멸당한 정예부대가 ‘롬멜’의 보물을 사하라 사막 어딘가에 숨겼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보물들을 찾으려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사하라 사막으로 몰려온다. 하지만 ‘롬멜’의 보물은 쉽게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1948년 6월, 독일 프랑스영사관에 ‘페터 플라이크’라는 한 남성이 ‘코르시카 섬’의 여행 비자를 신청하는데, ‘페터 플라이크’가 제출한 서류를 보던 영사관 직원은 그가 옛 독일군 친위대 잠수부였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되고 이에 ‘페터 플라이크’를 조사한다. 그리고 곧 ‘페터 플라이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을 듣게 된다. 5년 전인 1943년 9월 ‘페터 플라이크’는 상관으로부터 ‘코르시카 섬’ 근처 바다 속에서 철제 상자 6개를 숨길만한 장소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에 ‘페터 플라이크’는 코르시카 섬 인근 바다 속에서 적당한 동굴을 찾았다. 그 후, 그는 그 지점을 표시해 놓고 다음 날 보트에 철제 상자를 싣고 장교들과 함께 그 동굴로 떠났는데, 철제상자를 숨기는 장교들의 모습을 훔쳐보던 중 그 철제상자들 속에 엄청난 보물이 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그곳에 위치와 특징을 기억해 두었다고 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롬멜의 보물’이 사하라 사막에 숨겨졌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코르시카 섬 근처에 수장됐다는 ‘페터 플라이크’에 새로운 주장에 탐험가들은 이번엔 ‘코르시카 섬’으로 몰려들었고, 심지어 프랑스 정부는 ‘페터 플라이크’에게 협력을 제안하여 인양작업을 실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몇 달 동안 100억 프랑 이상을 들여 전문 잠수부들과 첨단 장비들을 총 동원해 탐색을 했으나 보물들을 찾지 못했다. 결국 ‘페터 플라이크’는 사기죄로 감옥에 구금된다. 그러던 1943년 9월 어느 날 밤, 독일 군인들이 코르시카 섬 근처 바다 속으로 상자들을 빠뜨리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목격자의 진술로 인해 사람들은 ‘페터 플라이크’의 말처럼 ‘롬멜의 보물’이 ‘코르시카 섬’ 인근에 숨겨져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두 달 후, 출옥을 하게 된 ‘페터 플라이크’, 그런데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해변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실종된다. 이에 수색에 나선 경찰들이 그를 끝내 찾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페터 플라이크’의 실종에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등 근거없는 다양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한다. 진실은 미궁에 빠진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1961년, 아일랜드의 한 기자가 과거 실종된 ‘페터 플라이크’에 대한 기사를 쓰던 중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페터 플라이크’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기자는 ‘페터 플라이크’가 사기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쓰게 되고 이는 사람들에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기자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발송된다. 이 편지는 바로 ‘페터 플라이크’가 보낸 편지였다. 그후 기자는 ‘페터 플라이크’를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페터 플라이크’는 이탈리아 해군이었으며, 1943년 9월 17일 모터보트에 철제상자 6개를 싣고 장교들과 함께 코르시카섬의 바스티아 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항 전, 상관이 철제상자 속의 물건을 확인하는 것을 훔쳐보고 그것이 ‘롬멜의 보물’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월 19일 목적지 바스티아 항에 도착하자 갑자기 연합군의 집중 폭격이 시작되었고 이에 다급해져 ‘롬멜의 보물’을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터 플라이크’는 당시 ‘롬멜의 보물’을 빠뜨린 지점이 폭파당한 어느 이슬람 사원 건너 편쯤이라고 고백한다. 이후 고들리 기자의 보도로 이 사실은 알려지게 되고, 또 다시 많은 탐험가들이 롬멜의 보물을 찾기 위해 몰려든다. 하지만 롬멜의 보물은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이에 많은 논란이 계속되던 중 2007년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테리 호지킨슨’이 롬멜의 보물은 코르시카 섬의 바스티아에서 1해리도 채 안되는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롬멜의 보물은 화제가 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롬멜의 보물’은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채 미궁속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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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미스테리 호박방, 그 존재는?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3. 22. 22:28

 방 전체를 모두 보석 중의 하나인 ‘호박’으로 꾸며져 있는 ‘호박방’. 기록에 의하면 다양한 색상의 호박이 벽은 물론 천장까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고 한다. 무려 약 6톤의 호박으로 꾸며진 ‘호박방’은 러시아 황실의 부와 권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박방이' 1941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데, 2003년 5월, 재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도시 건설 3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역사적인 도시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기념식 준비 위원장을 맡았으며, 세계 47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열흘 간의 축제 기간 동안 세상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취를 감춘지 62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되어 공개된 ‘호박방’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빈틈없이 방 전체가 호박으로 가득 채워진 이 황금빛깔의 ‘호박방’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예술성덕분에 세계 정상들의 눈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호박방’이 완전하게 복원되었음을 정식적으로 발표한다. 그는 47개국 대표 중 유일하게 독일 총리와 둘이 '호박방'의 문을 열었는데, 그 이유는 ‘호박방’이 러시아&독일의 깊은 역사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호박방’외교는 약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호박방’은 원래 러시아가 아닌 독일에 있었다. 18세기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왕비 '소피 샤를루트'를 위해 베를린에 있던 성을 재건축한다. 그리고 화려한 장식을 좋아했던 ‘프리드리히 1세’는 궁전의 방 중에서 하나를 보석 ‘호박’으로 꾸미기로 한다. 그러나 완공 되기 전 왕비가 사망하고 1713년 ‘프리드리히 1세’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빌헬름 1세’는 ‘호박방’의 건설을 중단시킨다. 그런데, 이 ‘호박방’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였다. 당시 표트르 1세는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매우 유명했다. '표트르 1세'는 서구에 비해 크게 뒤져있던 러시아에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특히 뿌리깊이 박혀있던 사회관습에 개혁을 실시했다. 그 예로 '표트르 1세'는 귀족의 상징이었던 수염을 잘랐고 굳이 수염을 지키고자 하는 귀족들에게는 ‘수염세’라는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렇게 1년간 모은 ‘수염세’는 새로운 함대를 만드는 자금으로 쓰였다. 그리고 외국어를 익히지 못한 귀족들은 신분을 박탈했다. ‘표트르 1세’가 이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한 것은 당시 러시아와는 달리, 발전한 서유럽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신분을 숨긴 채 서유럽에서 유학을 했으며, 유럽의 박물관, 대학, 천문대 등을 견학했으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직접 배를 만드는 작업을 직접 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유럽의 발전된 문화에 빠져있었던 ‘표트르 1세’를 사로잡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본 '호박방'이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 황실에도 ‘호박방’이 있다면 유럽 못지 않은 명성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직접 지으려니 예산이 너무 많이 들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때 ‘표트르 1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러시아 근위대를 달라고 수 차례 요청할 정도로 마음에 러시아 근위대를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빌헬름 1세’에게 자연스럽게 ‘호박방’에 대한 호감을 흘렸는데, 1716년 ‘빌헬름 1세’는 우정의 표시로 호박방을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다. 그러자 ‘호박방’을 선물한 것에 감동한 ‘표트르 1세’는 즉시 러시아 근위대 55명을 ‘빌헬름 1세’에게 보내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러시아와 독일의 우의를 상징하는 ‘호박방 외교’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호박은 1천만 년에서 수억 년에 걸쳐 침엽수에서 나온 송진이 화석화된 유기물 보석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호박의 내부에서는 고생대의 작은 동물들과 꽃씨, 나뭇잎 등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호박은 고생대 연구에 귀중한 자원으로서 멸종된 곤충과 식물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호박은 아름다운 빛깔 덕분에 오래전부터 다양한 장신구로 활용되어왔었는데, 호박으로 만든 귀걸이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호박을 이용한 반지와 조각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종교적 행사 때 호박을 태워 신성스러움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러시아 민화에서는 호박이 병을 치료해주고 장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어 '신비의 돌'로 불렸었다. 오래전부터 진귀한 보석으로서 인간의 사랑을 받았던 ‘호박’, 이 호박으로 방 전체를 장식한 ‘호박방’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궁전에 있다가, 17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예카테리나 궁'으로 이전된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호박방의 수난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독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한다. 그러자 소련은 독일군의 침탈을 피하기 위해 궁전의 소장품들을 시베리아 지역으로 옮겼는데, 안타깝게도 호박방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옮기지 못한다. 방 전체에 큰 덩어리로 부착된 호박들을 떼분해하는 것이 어려웠고 호박의 강도가 너무 약해 손상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호박방이 있던 예카테리나 궁전을 장악한 독일군은 36시간 만에 약 6톤에 달하는 호박들을 잘라서 가져가버린다. 이후, 독일이 가져간 호박방은 당시 독일령이었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의 성 안에 장식되어 소장품 번호 200이라는 숫자로 전시된다. 그런데, 1945년 4월 쾨니히스베르크 성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폭격과 함께 호박방은 모습을 감추고 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호박방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파괴된 쾨니히스베르크 성의 잿더미 속에서 호박방의 일부 조각들이 발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호박방이 폭격으로 인해 소멸됐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독일군이 호박방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긴 어렵기 때문에 호박방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 벙커’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오랫동안 호박방의 행방을 추적한 독일 사학자 '한스 슈타델만'은 분명히 옛 동독 땅 또는 쾨니히스베르크 어딘가에 호박방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독일과 체코의 국경마을인 ‘도이치노이도르프’에서는 호박방의 장식에 쓰였다는 금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자 도이치노이도르프 시장은 인공 동굴의 지하 20m지점에 금으로 추정되는 금속이 약 2톤 정도 묻혀 있으며 러시아 황실의 호박방을 장식한 금과 호박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추측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다른 보물들과 함께 제3국에 비밀 매장됐다는 것이다. 최대 2억 5천만 달러로 추정되는 진짜 호박방을 찾기 위해 보물 사냥꾼들은 세계 곳곳의 감옥과 벙커, 동굴들을 뒤지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호박방의 진품은 1997년 독일 베를린 여성이 신고한 서랍장 하나와 브레멘 경매시장에 등장한 ‘모자이크 패널’ 등 두 점 뿐이다. 결과적으로 호박방의 진품 찾기에 실패한 소련은 1979년 호박방을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한 복원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거기에 1991년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 해체되면서 복원 작업이 완전히 중단되고 만다. 이렇게 좌초된 호박방 복원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도와준 건 독일이었다. 1999년, 독일의 가스 수입회사인 ‘루르가스’가 호박방 복원을 위해 3백 50만 달러를 기증한 것이다. 독일의 도움으로 박차를 가한 '호박방' 복원사업에는 약 50여 명의 호박 공예 전문가들이 참가하였는데, 전문가들은 50만 개에 달하는 호박 조각들을 짜 맞췄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을 이용한 정밀한 세공과 조각작업으로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호박방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유일하게 남아있던 흑백 사진에 명암을 부활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렇게 1979년부터 시작한 '호박방' 복원작업은 자료조사와 옛 기술 재현에만 11년이 걸렸으며 총 24년에 걸쳐 110억 원이 투입됐다. 그리고 2003년 6월 사라진지 62년 만에 호박방은 새롭게 복원된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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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 공국, 그 정체는 무엇인가?

[흥미로운 이야기 상식] 2016. 3. 18. 22:31

2007년 1월 8일, 영국의 한 일간지에 황당한 광고 하나가 게재되는데, 사생활 보장과 지위 승격!을 내건 파격적인 내용의 이 광고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매우 황당하고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이 광고에 실린 판매 물품 때문이었다. 신문에 실린 판매 물품의 이름은 ‘시랜드(Sealand)’,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시랜드’가 군주제 국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광고 문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 돈 약 45,000원을 내면 ‘시랜드 공국(The Principality of Sealand)’에서 인정하는 백작신분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광고 내용으로 인해 이 광고 한 장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분위기로 인해 언론에서도 ‘시랜드 공국’에 실체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당시 광고에 표시된 ‘시랜드 공국’은 북위 51° 53’ 40’’ 동경 1° 28’ 57’’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위치는 에식스 주의 ‘하리치항’으로부터 11km 떨어져 있는 바다 위였다. 이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영해에서 포착되는 섬을 위주로 샅샅이 뒤졌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정말로 ‘시랜드 공국’으로 추정되는 조그마한 뭔가가 포착됐다. 언뜻 보기에 섬처럼 보인 ‘시랜드 공국’은 사실 2개의 원통형 구조물이 영토를 대신하는 플랫폼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위에 주거가 가능한 건물 & 헬리콥터 착륙장을 건설한 뒤 국기를 세워놓은 약 166평 정도의 구조물이었다. 그곳에는 당시 2명의 군인과 공작 1명 그리고 백작 1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시랜드 공국'에는 통치자까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패디 로이 베이츠’였다. 그러면 이 시랜드 공국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시랜드 공국’의 탄생배경은 1942년 시작된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영국,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동부해안에 해상벙커를 설치하였는데, 이 해상벙커에는 150~300명 정도의 병력이 상시 거주하며 작전에 합류했었다. 이렇게 이 해상벙커는 전쟁의 요새로 쓰이다가 1945년 종전이 되자 그 기능을 잃고 버려졌다. 헌데 22년 뒤에 ‘패디 로이 베이츠’가 사람들 앞에서 이 해상벙커를 ‘시랜드’라고 명명한 뒤 한 나라로서 독립한다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한것이다. ‘패디 로이 베이츠’는 해상 벙커가 만들어질 당시에 영국에 육군 소령이었다. 그런데 전역을 하고 라디오 해적 방송을 운영하고 있던 ‘패디 로이 베이츠’는 어느 날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해상벙커를 생각하게된다. 그리고 그는 이 해상벙커가 영국령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해상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영국 법적으로 규제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영국 해군이 지어 이용했었던 해상벙커를 ‘시랜드 공국’이라고 명명한 뒤, 자신 스스로 ‘시랜드 공국’의 통치자라 정한 것이다. 그리고 ‘패디 로이 베이츠’자신의 신분을 공작으로 바꾼 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였다. 그리고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시랜드 공국'의 백성으로 두었던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시랜드 공국'에 건물을 살펴보면 10여 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있는데, ‘시랜드 공국’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시랜드 공국'의 신분증이 발행되어 있으며, 신분증이 발급된 사람들은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화폐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우표로 외부와 간단한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인은 ‘시랜드 공국’에 출입 시 반드시 여권확인을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었는데, 만약 위의 규제를 어길 시에는 이에 합당한 처분이 주어진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은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선발하여 독립국으로서 의지를 다지는 등 한 나라로서 갖춰야 할 조건들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어느 날, 영국 해군이 해상벙커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랜드 공국’ 사람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영군 해군에게 총알이 날라온다. 당시 ‘시랜드 공국’의 경비를 섰던 '패디 로이 베이츠'의 아들인 '마이클'이 영국 해군을 발견하고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영국 해군은 ‘시랜드 공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 한 뒤 '시랜드 공국'의 사람들을 강제퇴거 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영국해군의 생각되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랜드는 영국 영해 밖 공해에 있기 때문에 영국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다.”라며 영국 법정에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 지도 어디에도 ‘시랜드 공국’은 표기되지 않는다. ‘시랜드 공화국’ 사람들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시랜드 공화국’은 세계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한 나라가 없다. 즉, ‘시랜드 공화국’은 현재 존재하지만 국가로는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랜드 공국’에서는 황당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8년 독일 출신의 사업가가 ‘시랜드 공국’을 방문했다가 마음대로 '시랜드 공국'을 검거(점령)한 것이다. 이에 시랜드 국민 전체가 합심하여 그들을 제압한 뒤 사업가를 붙잡아 포로로 선포한다. 그리고나서 '시랜드 공화국'은 독일과 포로 협상을 벌였다. '시랜드 공국'에서는 이 사건을 ‘외자의 난’이라 칭하는데 이 일은 ‘시랜드 공국’ 역사에서 중요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패디 로이 베이츠’는 아들 ‘마이클’에게 통치권을 승계한 뒤 ‘시랜드 공국’을 떠나버렸다. 한편, 마이클은 국민들에게 ‘시랜드 공화국’의 발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은 영국과 영해권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싸움이 계속되어 마찰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시랜드 공화국’에서 발행된 여권이 범죄자들에게 이용되는데,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시랜드’의 존재가 엄청난 문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영국과의 대립은이 빈번해지자 ‘시랜드 공국’의 국민들은 '시랜드 공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6년에는 ‘시랜드 공국’에 전기를 공급하는 기계에 불이나 국민들 중 일부가 사망했으며, 지금은 경제적 문제로 힘들어져 통치자와 단 한 명의 백작만 남아있는 상태다. 계속된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자 2007년, ‘시랜드 공국’은 결국 약 1,200억 원에 '시랜드 공화국'을 판매 물품으로 내놓았다. 이에 실제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이 ‘시랜드 공화국’을 사려하였는데, 교통수단이 불편하다고 접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래를 취소한바 있다. 아직도 ‘시랜드 공국’은 자기네 정부가 승인한 신분 작위를 판매하고 있으며 ‘시랜드 공국’을 매입 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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