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수상한 빛, UFO의 빛?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1997년 3월 13일 저녁 6시 55분 네바다 주에 사는 20대 여성은 정체모를 불빛을 보게 된다. 먼 하늘에서 그녀를 향해 다가오던 불빛은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 불빛은 한 시간여 뒤, 에리조나 주 피닉스시 도심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에 나타난 불빛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고 비교적 오랜 시간 피닉스 시 밤하늘에 머물렀다. 이 불빛은 특이하게도 5개의 둥근 빛이 v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크기는 대형여객기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약 5분 후 불빛은 갑자기 사라진다. 20여분 뒤 피닉스 국제공항에서 다음 비행을 준비하던 항공기 조종사 ‘제리웰’도 이 불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제리웰’은 이 사실을 즉시 피닉스 공항 관제탑에 보고했지만, 이상하게도 관제탑에서는 공항 상공에 포착된 비행체가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이날 ‘제리웰’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서, 공항, 인근 공군기지에 불빛에 대한 제보를 했지만 그 누구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음 날, 각종 매체에서는 피닉스에 UFO가 나타났다는 뉴스가 쏟아져 나왔고 그와 함께 보잉747만한 물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거나 시속 120km의 자동차가 이 불빛을 지나치는데 5분이나 걸렸다는 등에 목격담이 전해졌는데, 사람들은 이 사건을 ‘피닉스 UFO’라 부르게 된다. 결국 그 날 저녁, 애리조나 주 의회에서 주지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게 된다. 당시 애리조나 주지사는 지난 밤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불빛에 정체는 미 공군이 훈련 도중 항공 조명탄이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주 의회의 기자 회견 후, 일제히 매체들은 정정보도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직 공군 출신 목격자는 그 불빛은 조명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조명탄은 일정 고도에서 폭발한 뒤 서서히 낙하하도록 되어있는데,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불빛은 같은 높이에서 장시간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명탄은 점점 빛을 잃어가야 하는데 당시 불빛은 같은 밝기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지사의 발표에 의문이 가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불빛이 나타났던 1997년 3월 13일에는 공군의 훈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사실 미국에서 UFO가 발견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7년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 지역에 미확인 비행물체가 추락했을 당시 미 정부는 로스웰 지역에 UFO가 추락했다는 입장 표명 후 곧바로 인공위성 추락으로 말을 바꾸며 혼란을 발생 시켰었다. 그리고 1995년 로스웰 외계인 해부 동영상이 세상에 공개되며 그 진위 논란이 발생하는 등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았다. 또 1965년에는 미국 켁스버그 지역에 미확인 비행물체가 추락했었는데, 당시 미 정부는 목격자들의 입을 막고 비밀리에 비행체의 잔해를 수습한 뒤 추락한 비행체가 유성이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사건들에 대한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피닉스 사건 역시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남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0개월 뒤인 1998년 1월 12일 다시 한 번 정체불명의 불빛이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다. 이에 또 다시 애리조나 주 의회에 문의가 빗발친다. 그런데, 주 의회는 또 다시 미 공군의 조명탄이라 발표한다. 그리고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조명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발표까지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의혹은 더욱 커져갔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일각에서 이 불빛이 미 공군의 최신 비행 실험 중 생긴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피닉스에서는 미 공군 기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공군기지에서 새로운 비행체 실험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미 공군이 실시한 홀로그램 실험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홀로그램으로 만든 가짜 이미지를 이용해 적군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심리전 무기이자 비살상 무기 개발을 해왔고 실제로 베트남전과 걸프전에도 활용해 큰 성과를 거두어왔다. 즉, 이런 비밀 무기 실험 도중 실수로 시민에게 실험 사실이 노출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다양한 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UFO 연구학자들은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불빛이 ‘블랙 트라이앵글(Black Triangle)’이라 불리는 UFO 현상과 유사하다는 주장을 한다. ‘블랙 트라이앵글(Black Triangle)’이란 194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발견된 검은 삼각형 모양의 미확인 비행물체들로 이 미확인 비행물체들은 주로 도시 밤하늘의 낮은 고도에서 발견되며 검은 비행체 밑면에 둥근 불빛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당시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불빛의 특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뉴멕시코 주에 초자연현상 전문가는 이 사건이 과거에 ‘바빌론 프로젝트(The project of Babylon)’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빌론 프로젝트(The project of Babylon)’는 50여 년 전 미국 서부 사막에서 비밀리에 행해진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이다. 이 실험 당시 열렸던 스타게이트를 통해 UFO가 지구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 의회에서 성명을 발표한 날 저녁과 그 다음 날 또 다시 V자 형태의 불빛의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다시는 조명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주 의회에 주장을 무시하기라도 한 듯 나타난 것이다. 이에 불빛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10년 후인 2007년, 당시 피닉스 상공에 불빛은 미 공군의 조명탄이라고 입장을 밝힌 주지사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그는 당시 피닉스 상공에 나타난 불빛이 조명탄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당시 그 불빛의 정체는 모른다고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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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악어인간, 그 실체는?

1993년 이후 미국 롱비치(Long beach)지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스타가 있다. 이 스타의 애칭은 ‘제이크(JAKE)’로, 그는 미국 롱비치에 위치한 ‘머시즈 프리 박물관(Marsh's Free Museum)’의 한 평 크기의 유리관 속에 존재하는데, 그 모습이 남달랐다. 130cm의 키에 단단한 껍질로 이루어진 하반신, 마치 인어공주처럼 하반신은 꼬리로 되어있고, 머리털이 약간 남아있는 머리, 사나운 눈매, 뾰족한 이빨, 애리한 손톱, 사람보다 조금 더 큰 어깨뼈가 부자연스럽게 삐져나온 상반신은 남자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하반신을 덮은 꼬리와 꼬리를 덮은 비닐, 날카로운 손톱과 밖으로 툭 삐져나온 어깨뼈 구조는 악어와 일치했는데, 이 괴이한 형체의 미라를 전시하고 있는 ‘머시즈 프리 박물관(Marsh's Free Museum)’ 측은 이 ‘악어인간 미라’가 진짜 살아있었던 ‘악어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박물관장의 주장은 1880년대에 목격된 ‘악어인간’에 대한 기록해서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축제가 한창이던 당시 거리 구경에 나선 노인이 있었는데, 노인은 매년 드라이브를 즐기며 텍사스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가 꼭 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악어인간 제이크 쇼(JAKE, the crocodile man show)’였다. 당시 노인이 이 축제에서 본 ‘악어인간 제이크(JAKE, the crocodile man)’를 묘사한 기록에는 대중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사람들이 던지는 간단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머리를 흔들어 의사표현을 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후, ‘악어인간(Alligator man)’이 죽은 뒤인 1967년, 텍사스의 축제에서 텍사스의 축제에서 쇼를 했던 ‘악어인간 제이크’라는 ‘악어인간(Alligator man)’은 미라가 되어 경매광고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악어인간(Alligator man)’이 경매로 나오던 날 캘리포니아 주의 한 경매장에는 ‘악어인간 미라’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불꽃 튀는 경매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악어인간은 현재가치로 500만원에 금액을 제시한 ‘머시즈 프리 박물관(Marsh's Free Museum)’ 관장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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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 ‘악어인간 미라’는 유리관 속에 갇혀 전시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뒤, ‘악어인간 미라’가 언론에 주목을 끄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93년 9월 11일, 플로리다의 늪 인근 숲속에서 악어인간을 목격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다. 목격담에 따르면 플로리다 일대를 탐험하던 한 남자는 이상한 느낌에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는데, 그곳에 반은 인간이고 반은 악어인 괴물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나자 사람들은 ‘악어인간(Alligator man)’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악어인간 미라 제이크’가 박물관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후 ‘악어인간 미라 제이크’는 사람들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악어인간’은 박물관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벌인 사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이크’는 조작된 미라일까? ‘악어인간’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도룡뇽 인간’, ‘박쥐 인간’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희귀 생물체의 미라가 등장한 적이 많았으나 그 대부분은 누군가가 사진을 합성해서 만들었든가, 개와 고양이의 사체를 교묘히 이용해서 미라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악어인간’도 이와 같을 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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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박물관장은 대학 연구팀에 ‘악어인간 미라(제이크)’의 분석을 의뢰한다. 그리고 얼마 후, 분석을 맡았던 연구팀이 검사 결과를 내놓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바로 그 어떠한 조작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X선 검사 결과 ‘악어인간 미라’는 12개의 늑골과 견갑골이 꼬리까지 이어져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인공적으로 뼈를 짜맞춰서 조작할 수 없는 형태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도 ‘악어인간’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검사 결과 역시 날조된 것이라며 ‘악어인간(crocodile man)’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렇게 '악어인간(crocodile man)'에 대한 논란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 생물학자 ‘폴 세레노(Paul C. Sereno)’가 ‘악어인간(crocodile man)’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생물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고대 사람들의 풍습 중에는 사후 인간의 몸체를 악어의 몸체와 이어 붙여서 ‘악어인간미라’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과 고대 이집트 신화에 저주 받은 사람의 영혼을 먹는 악마 ‘암무트’가 반은 여신이고 반은 악어였다는 점을 들어 ‘악어인간(crocodile man)’은 실제로 고대에 생존했던 생물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장에 대해 하나의 근거를 제시했는데, 니제르와 모로코 등지에서 발견한 고대화석 5점 중 한 점이었다. 악어의 머리를 뺀 몸길이가 약 1m 정도 되는 기이한 형태의 악어화석이 ‘악어인간’의 몸 구조와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구울드(Stephen J. Gould)’박사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폴 세레노’가 제시한 화석은 악어의 한 종류일 뿐 ‘악어인간’으로 보기 어려우며, 고대문헌에 등장하는 '악어인간(crocodile man)'은 당시 고대민족의 상상도일 뿐 실존의 근거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제시한 것은 괴물이론. 지금까지 우리는 종의 발전에 있어 장기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변화한다는 이론인 다윈의 개념을 믿고 있지만 사실 종의 발전은 점진적이지 않으며 수백만 년 동안 서서히 변화하다가 갑작스럽게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이론으로 ‘악어인간(crocodile man)’ 역시 새롭게 탄생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학자들 사이에 ‘악어인간(crocodile man)’에 대해 분분하던 중, 또다시 ‘악어인간(crocodile man)’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 남자가 모래 언덕 한 가운데에 있는 ‘악어인간’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악어인간(crocodile man)’에 대한 사람들에 관심은 비상해졌고, 심지어 한 일간지에서는 또 다른 가설을 내세우기에 이른다. ‘악어인간(crocodile man)’이 악어에 세균에 감염되어 나타난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내용에 따르면 성격이 과격한 악어는 영역싸움을 하면서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게 되는데, 이때 악어의 혈액이 세균에 감염되고 그래서 발생한 세균이 굉장히 강력해서 주변환경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어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그 중에서 악어가 상처를 입거나 죽게 되는 악어가 생길 경우 악어의 상처와 사체는 세균에 즉시 감염되고 이때 악어의 혈액이 물과 섞여 흐르다가 상처가 난 인간이 그 물에 접촉할 경우 악어의 세균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서 이 후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악어인간(crocodile man)’은 세균에 감염된 악어로 인해 나타난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악어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주장은 가설일 뿐 아직까지 이에 대한 주장은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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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라미드, 쿠푸왕의 피라미드

1979년 ‘바이킹 호(Viking spacecraft)’를 통해 화성의 표면을 탐사하고 있던 나사(NASA). 그러던 중 ‘바이킹 호(Viking spacecraft)’가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고 과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바이킹 호(Viking spacecraft)’가 보내온 사진들 중간에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 모양의 구조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이것이 빛에 의한 단순한 착시현상인지 인공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엉뚱하게도 세계가 주목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였다. 그 이유는 '바이킹 호(Viking spacecraft)'가 전송해 온 사진 속 구조물과 똑같은 모양의 피라미드가 이집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기자지역'에는 4,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는 평균 2.5T의 돌 230만 개를 쌓아올린 피라미드였다. 완공 당시의 높이는 147M, 바닥면적은 53,000제곱미터로 그 규모를 지금의 인공적인 구조물과 비교해보면 현대의 42층 높이의 빌딩의 높이에, 10개의 축구장을 합한 바닥면적에 달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럼 과연 이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는 누구의 피라미드일까? 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 ‘대피라미드’가 ‘쿠푸왕의 피라미드’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1837년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안에서 ‘쿠푸왕(Khufu)’이라고 새겨진 상형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라고 불리게 됐다.(‘쿠푸왕(Khufu)’은 이집트 4대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기원전 2551년부터 2528년까지 약 2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왕이다. 하지만 '쿠푸왕(Khufu)'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고 오직 7.5CM의 작은 ‘쿠푸상’ 하나만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왕이다.) 그런데, ‘쿠푸왕(Khufu)’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를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보통 이집트 피라미드는 왕이 사후에 살고 있는 궁전이라 생각하여 완성되면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돌로 막아 어느 곳이 입구인지 알 수 없도록 했는데,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외벽에서 입구가 발견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외벽 입구는 내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막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로인해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안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소문에도 오랜 시간동안 도굴범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이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안으로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었다. 그는 818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쿠푸왕(Khufu)’의 막대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대피라미드’를 파헤치도록 명령했고, 결국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쿠푸왕’의 보물과 미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에 도달하게 된 ‘칼리프 알 마문’, 그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여왕의 방’이었다. ‘여왕의 방’은 동서 길이 5.75m, 남북 길이 5.68m, 높이 6.22m에 천장은 우아한 맞배구조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의 동서축과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한것과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흔히 발견되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벽화, 유물, 미라 등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실망한 ‘칼리프 알 마문’은 다시 통로를 따라 들어갔고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왕의 방’이었다. 하지만 '왕의 방' 역시 텅 비어있는 왕의 석관만 존재할 뿐 이집트 왕의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보물, 유물, 벽화, 부장품, 왕의 미라 등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점은 '왕의 방'이 수학적 계산으로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방'이 정확히 3:5의 비율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3:5의 비율, 즉 황금비율은 기원전 4세기 전후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에서 황금분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왜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에는 왕의 미라, 유물, 보물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첫 번째 가능성은 '도굴'이다. 하지만, 내부와 외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굴을 당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가 ‘쿠푸왕(Khufu)’의 진짜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다. 일부 학자들은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가 ‘쿠푸왕(Khufu)’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동지에 해가 지기 바로 직전 ‘대피라미드’의 그림자를 연구했는데, 그 그림자의 끝은 나일강 유역이었다. 과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나일강 가운데 있는 섬 지하 어딘가에 쿠푸왕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학자들은 이 기록과 연구결과가 일치한 다는 점을 들어 쿠푸왕의 진짜 무덤은 나일강 유역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는 도굴을 막기 위해 만든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가능성은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 내부에 '비밀의 방'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이집트에서 왕은 신이자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정중앙에 왕의 방이 건설되는데, 이에 반해 ‘쿠푸왕의 방’은 정중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어떤 곳에 진짜 왕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1992년 로봇 공학자 ‘루돌프 간텐브링크’ 탐사팀은 여왕의 방 위쪽에 있는 환기 통로에 탐사로봇을 투입했다. 혹시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그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로봇이 통로의 끝에서 두 개의 구리 손잡이가 달린 돌문을 발견한 것이다. 탐사팀은 이것이 바로 비밀의 방으로 가는 통로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는 그것이 비밀의 방이 아닌 공기 통로에 불과하다며 탐사팀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 정부는 ‘루돌프 간텐브링크’ 탐사팀의 피라미드 탐사 재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집트 정부는 ‘여왕의 방’을 폐쇄한다. 갑작스런 이집트 정부의 태도변화에 사람들은 당황했고 여기에 대한 의문이 재기되는 가운데 2002년 이집트 정부가 다시 ‘여왕의 방’을 공개하면서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합동팀이 ‘루돌프 간텐브링크’팀이 발견한 돌문을 기계로 뚫어 탐사하게 되는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가로막힌 또 다른 돌문이었고 결국, 어딘가에 비밀의 방이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남긴 채 탐사에 실패하게 된다. 계속된 실패에도 2010년 영국 리즈 대학교 기술진은 어렵게 이집트 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집트 문화재청과 함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Khufu)’의 비밀을 풀기 위해 현재까지 탐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과연 비밀의 방이 발견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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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세계13대 마경, 맨착 늪지대


‘미크로네시 추크 라군’, ‘인도 자이푸르 반가라’, ‘프랑스 파리 카타콤’ 등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세계13대 마경, 그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의 한 늪지대. 늦은 밤, 한 남자가 홀로 이 늪지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끔찍한 유령이 목격됐다. 이 곳은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 있는 ‘맨착 늪지대’로 길이 36KM 수심 0.9M의 넓고 얕은 늪지대이다. 사이푸르스 나무가 짙게 드리워져 한낮에도 어둡고 컴컴한대다가 나무 위에는 검은 독수리들이 그 아래 물속에는 수많은 악어들이 우글거리는 ‘맨착 늪지대’는 스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로 유명세를 얻어 세계 13대 마경 중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루이지애나 최고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맨찰 늪지대를 찾아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거나 유령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이어졌고 뿐만 아니라 사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시신들이 발견되는 등 ‘맨착 늪지대’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이나 단체에서 ‘맨착 늪지대’를 찾아가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는데, 허허벌판의 늪지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는 한 남자, 그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잡음가운데 누군가의 분명한 말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유령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는가하면, 미국의 한 TV프로그램에서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맨착 늪지대’를 촬영한 화면을 보면 나무만 무성한 들판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붉은 색을 띤 무언가의 모습이 포착되는데 이것이 유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맨착 늪지대’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늪지대에 유령이 나타나는 것이 모두 한 여자의 저주 때문이라는 마을 사람들. 사실 맨착 늪지대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1913년 ‘맨착 늪지대’ 인근에 위치한 프레니어란 마을에 ‘줄리 화이트’라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서인도에서 유래한 민간 신앙인 ‘부두교’에 주술사로 여러 수호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특히, 줄리 화이트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 등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흑인 노예 해방운동이 시작되자 흑인 노예들이 많이 믿던 ‘부두교’가 백인 주민들에 의해 박해받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 역시 부두교사 악마를 숭배하는 사탄의 종교라며 급기야 부두교의 주술사인 그녀를 쫓아내려 했는데, 몇 년 후 죽음을 앞둔 ‘줄리 화이트’, 그녀는 마을 사람들 모두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을 남긴 채 눈을 감는다. 그런데, 다음날 거대한 허리케인이 마을을 덮쳤고 그로인해 마을이 수장되며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에 사람들은 ‘줄리 화이트’의 저주로 죽은 마을 사람들이 유령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1915년 루이지애나에 강력한 허리케인이 몰아친 적이 있었고 ‘맨착 늪지대’ 인근의 마을 3곳이 수장되면서 무려 2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사실까지 알려지자 ‘맨착 늪지대’는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유령이 극도의 공포심이 불러온 환영에 불과하며 ‘줄리 화이트’에 대한 전설 또한 ‘맨착 늪지대’를 유명장소로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며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맨착 늪지대’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1915년 허리케인 때문에 사망한 시신들이 뒤늦게 떠올라 흘러내려온 것으로 이 또한 한 두건에 불과 할뿐 과장된 이야기라 덫붙였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맨착 늪지대’에 유령이 나타난다고 믿고 있으며, 이렇듯 ‘맨착 늪지대’의 전설과 유령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는 가운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맨착 늪지대’의 유령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맨착 늪지대’를 홀로 여행한 사람가운데 끝까지 ‘맨착 늪지대’를 둘러보고 온 이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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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신체이형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

2005년, 미국 유명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한 청년. 그는 누가 보아도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표현한 남자는 '제스'라는 청년으로 그의 뜻밖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자기의 눈은 이상하고 양쪽 턱선도 비대칭이며, 피부도 더럽고 전부 다 기형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이 매우 흉측한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지나치게 하루 종일 외모에 신경을 썼고 그로인해 직장을 계속 그만 둬야 했으며,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자신의 자동차 룸미러 조차 쳐다보지 못하게 되어 직접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됬다. 이런 '제스'에 고백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의학박사 '캐서린 필립스'는 이러한 증상이 정신질환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신체이형장애, BDD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신체이형장애란 정상적인 용모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외모에 심각한 기형이 있다고 왜곡되게 인식하는 정신적 질환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실제로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는 '샤이엔'이라는 여성이 그린 그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샤이엔'은 자신의 외모와 다르게 왜곡되게 그림을 그렸다. '캐서린'박사는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의 수가 전세계 인구의 2%에 달하며 심각한 성형중독 또한 신체이형장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신체이형장애 때문에 무려 26번이나 성형 수술을 한 사례가 있었다. 2001년, 텍사스에 사는 '제니'는 남편으로부터 외모에 대한 지적을 받고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외모가 흉측하다고 생가가게 된 그녀는 성형수술을 받게 되는데 아무리 고쳐도 자신의 얼굴이 흉측하게 보이는 제니느 그후 강박처럼 치아, 코, 볼, 가슴 뿐만아니라 팔, 배, 엉덩이, 허벅지, 무릎까지 지방흡입 등의 총 26번의 수술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는 것은 일반인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유명인들도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할리우드 유명 스타인 브루스 윌리스와 데미무어의 딸 탈룰라 윌리스. 그녀는 한 인터뷰를 통해 13세부터 '타블로이드지'를 읽으면서 자신의 외모를 혐오하기시작했고 심지어 계속해서 굶어 체중이 40kg이 채 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 미국 유명 드라마 '모던 패밀리'에서 딜런 역을 맡았던 '리드 유잉' 역시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를 준비하던 시절 연기를 위해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분석하던 중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얼굴에 큰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고 급기야 성형수술을 수 차례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마이클 잭슨 역시 이 증상을 앓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얼굴과 턱 등 1990년대 후반까지 수차례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1979년 안무 도중 코 부상으로 코 수술을 하게 되는데 그 후 수술한 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유로 1981, 1984, 1986년에 계속 코 수술을 받아 부작용으로 코가 주저앉아 보형물을 넣고 짙은 화장으로 가려야만 했다. 이러한 사례만 봐도 마이클 잭슨이 신체이형장애로 고통받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이형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외모를 실제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일까?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2010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이미 류스너'교슈는 신체이형장애는 뇌기능 이상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체이형장애 환자 17명 vs 일반인 16명에게 자신의 얼굴 사진과 유명한 남자 배우 사진을 보여줄때 뇌반의 차이를 보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신체이형장애 환자들의 뇌인지를 살펴보면 일반인과 달리 뇌에서 시각자극을 처리하는 영역이 비정상적이었다고 한다. 신체이형장애 환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볼때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구체적인 부위만 본다는 것이었따. 즉, 이러한 뇌기능 이상으로 자신의 얼굴을 실제와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이미 교수' 역시 이러한 뇌기능 이상의 원인은 설명하지 못했다. 그밖에도 신체이형장애의 원인에 대해 환경적인 요인, 유적적인 요인 등 다양한 설이 제기 되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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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족보'란


1. 족보의 정의

 족보(族譜)는 시조로부터 혈통의 계승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선후 대수(代數)와 항렬별로 친소관계(親疎關係)를 밝힌 기록.[각주:1]


2. 족보의 연원

 족보기록의 역사는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과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관직이 있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소사는 계통(系統)을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하는 벼슬이었다. 족보는 파계(派系)를 밝히고 소목을 분별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후세의 족보기록은 이 소사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각주:2]


3. 족보의 형태

 족보는 신분과 기록하는 방식, 범위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첫째, 족보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왕실족보(王室族譜)와 사가족보(私家族譜)로 구분된다. 조선이 건국되고 왕실은 세계(世系)를 분명하게 하여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왕실족보를 편찬하였다. 왕실의 친족제도 정비와 왕실족보의 편찬은 사가(私家)의 족보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대부들은 관료제와 신분제의 재정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실과 마찬가지로 족보를 편찬하였다. 둘째, 족보는 기록하는 방식에 따라서 족도(族圖)와 족보(族譜), 팔고조도(八高祖圖), 가첩(家牒) 등으로 구분된다. 족도는 본인을 중심으로 종적인 조상세계를 계보화하고 횡적인 자녀와 내/외손의 파계를 정리하여 한 장의 도표로 만든 것이다. 족보는 조상에 대한 가계 기록을 보다 체계화하여 서책(書冊)으로 편찬한 것을 말한다. 팔고조도는 자기를 중심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의 조상 내외를 고조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가계도이다. 가첩은 가보(家譜) 혹은 가승(家乘)이라고도 하는데, 동족의 전부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직계에 한해서 발췌하고 초록한 세계표이다. 특히 가첩은 절첩본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휴대용으로 적합하였다. 셋째, 족보는 수록하는 범위에 따라서 씨족보(氏族譜)와 만성보(萬姓譜)로 구분된다. 씨족보는 특정한 성씨의 혈통관계를 밝힌 것으로 파보(派譜)와 대동보(大同譜)로 다시 구분된다. 가첩은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자기의 가계를 직계에 한정하여 기록한 계보(系譜)이다. 대동보는 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동성동본 모두를 기록한 족보이며, 파보는 동성동본 가운데 특정파만을 기록한 족보이다. 만성보는 특정 성관을 기록한 씨족보와 달리 모든 성관의 혈통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만성보는 자기 집안 뿐만 아니라 남의 집안까지도 연구하는 보학(譜學)이 발달하면서 타 성관의 가계를 알기 위해서 편찬되었다.[각주:3]


4. 한국의 가계기록(家系記錄)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가계기록의 역사는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비문에 추모왕부터 17대 광개토왕에 이르는 역대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것도 그 실례이다. 이후 통일신라에서도 가계의 분화에 따라 독립된 가계를 정리할 사회적 필요성으로 가계기록물이 만들어졌다. 고려 건국 후에는 문벌귀족사회가 전개되면서 직계조상을 주로 적는 가계기록이 등장했는데, 보-조-증조-외조의 사조(四祖)를 기준으로 하고, 여기에 처와 장인, 자녀와 사위의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고려후기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집단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상의 계보를 멀리 끌어올리는 한편 모계와 처계 및 사위와 며느리의 가계를 종합한 가계기록을 만들었다.[각주:4]

 본격적인 의미의 가계기록이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조선 초기에 들어 작성되었다. 이들 족보는 외손을 본손과 마찬가지로 세대의 제한 없이 수록하였고, 자녀를 기록하는 순서도 출생 순으로 기록하였다. 그 후 17세기 후반 이후 18세기에 문벌숭상의 사회풍조로 인하여 자신과 후손들의 가계배경을 확실히 밝힐 필요성 때문에 합동가승보(合同家乘譜)가 유행하였다. 조선후기 족보는 부계혈족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외손에 대한 기록을 소략하고, 또한 자녀의 수록 순서도 선남후녀(先男後女)의 형식으로 수록하였다.


5. 한국 최고(最高)의 족보

 현재 전해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族譜)는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이다.[각주:5]


위에 내용 중 인용된 내용의 참고자료는 각주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1. 차장섭, 『조선시대 족보의 유형과 특징』 [본문으로]
  2. 권오영, 『조선시대의 족보기록에 보이는 유교이념의 양상과 의미』 [본문으로]
  3. 차장섭, 『조선시대 족보의 유형과 특징』 [본문으로]
  4. 김용선, 『족보 이전의 가계기록』,『한국사시민강좌』 [본문으로]
  5. 박용운, 『安東權氏의 사례를 통해 본 高麗社會의 一斷面』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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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 사적1호~10호 알아보기!!

오늘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 중에서 사적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적이란 기념물 중에서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토목·교육·사회사업·분묘·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을 뜻하는데요. 현재 사적은 제1호부터 제533호까지 있는데 그 중 사적1호~10호까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사적1호 - 경주 포석정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3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신라시대 연회장소로서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5.234㎡의 면적으로 원래는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정자는 없고 물길만 남아있다. 물길은 무려 22m이며 높낮이의 차이는 5.9cm이다. 고대 중국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벚들과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이를 본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유상곡수연 :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는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셔야했던 잔치)


2. 사적2호 - 김해 봉황동 유적

 소재지 -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시대 - 청동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의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적으로,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인데, '조개더미'라고도 한다. 봉황대 언덕 인근에 시기가 서로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조개더미에서 토기, 석기, 가락바퀴, 중국 화폐인 화천, 탄화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와 다양한 무덤유적(고인돌, 옹관묘)들이 있다. 


3. 사적3호 - 수원 화성

 소재지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조선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평한 평지를 따라 쌓아진 평산성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짓기 시작해 1796년(정조 20년)에 완성되었다. 수원 화성의 둘레는 약 5.7km, 높이는 4~6m에 달한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으며 거중기 등을 이용해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수원 화성 안에는 화성행궁, 내포사, 사직단, 중포사가 있었었다.(지금은 화성행궁과 내포사만 복원되어있다.) 1796년부터 현재에 오면서 성곽과 시설물들이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와 복원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4. 사적4호 - 부여 가림성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 (군사리)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백제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백제의 수도였었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보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부근에 지은 석성으로 501년(백제 동성왕 23년)에 위사좌평이었던 백가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가림성은 돌과 흙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형태는 테뫼식(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형태)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터, 남서북문터,우물터 3곳 그리고 보루(방어시설)가 남아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성곽 중 유일하게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성이다.


5. 사적5호 - 부여 부소산성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삼국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사비시대의 도성으로 성이 자리한 부소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부른다.(삼국사기에서는 사비성, 백제본기에서는 소부리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던 538년(백제 성왕 16년)에 왕궁을 지키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00년(동성왕 22년)경에 테뫼식 산성이 이미 있었던 것을 605년(무왕 6년)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그리하여 테뫼식과 포곡식이 혼합된 형태의 산성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터, 영일루, 사비루, 낙화암, 고란사 등이 남아있다. 


6. 사적6호 - 경주 황룡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경주 월성 동편에 궁궐을 짓던 중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찰(절)로 고쳐 지어지기 시작해 17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후 5m가 넘는 삼존불상을 만들고 이를 모시고자 584년(신라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지었다. 그리고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바람으로 9층 목탑을 건축하게 되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무려 93년간에 걸쳐 조성된 큰 절이었다.) 하지만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고의 침입으로 다 타버려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7. 사적7호 - 경주 망덕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신라 문무왕이나 문왕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경주 낭산 기슭에 위치한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679년(신라 문무왕 19년) 당나라가 침입을 하자 부처의 힘으로 이를 이겨내고자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당나라가 알고 사신을 보내오자 사천왕사 대신 이 절을 보여 주며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뜻에서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동서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가 남아있다. 쌍탑 가람배치 형태이다.


8. 사적8호 - 경주 사천왕사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통일신라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674년(신라 문무왕 14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명랑법사에게 이를 막을 계책을 구하는데, 신유림에 사천왕사라는 사찰을 지어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자고 하였다. 이에 사천왕사는 679년에 완공되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현재 남아있다.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접어들고 가장 먼저 지은 절이었다. 


9. 사적9호 - 없음


10. 사적10호 - 서울 한양도성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외

 지정일(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시대 - 조선시대

(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유적 정보 - 한양을 둘러싼 도성으로 1395년(조선 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흙과 돌로 지은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두었다. 이후 1422년(조선 세종 4년) 흙으로 쌓은 곳을 전부 돌로 바꾸고 공격과 방어시설을 늘렸다. 그리고 1704년(조선 숙종 30년)정사각형의 돌들을 다듬어서 벽면이 수직이 되도록 쌓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면 더욱 다양한 자료들과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으니 한 번 방문하셔서 둘러보세요~~우리의 문화재는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찾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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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가이스트, 스코틀랜드 커버넌터스 무덤의 보이지 않는 자의 공격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시에는 17세기에 사용되었던 커버넌터스 감옥이 있었고 그 감옥 안에는 그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들은 모두 쇠사슬과 자물쇠로 잠겨있었으며 햇빛이 비치는 날에도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내는 스산한 곳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커버넌터스 감옥' 무덤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무덤 근처를 지나가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졸렸다는 한 여성, 하지만 경찰들은 이상한 여자라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고 넘겨버린다. 그런데 그 후에도 무덤 주변을 지나가다 누군가에게 갑자기 공격을 받았다는 피해자들이 속출한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자신을 공격한 것이 무엇인지는 못 보았다고 증언했으나 그들의 몸에는 멍자국, 물린 자국 등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뿐만아니라 매일 무덤 주변에 원인 모를 동물들의 사체가 쌓여갔다. 이에 사람들은 무덤 가는 길을 '죽음의 거리(The street of Death)'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렇듯 알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결국 에든버러 시에서는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된다. 그리고 조사 중 무덤 중에서 제일 끝에 위치한 '블랙 머슬리움 무덤'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상한 일들이 바로 그 무덤 문이 열리면서 깨어난 유령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체가 없는 유령이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초자연적 현상인 '폴터가이스트'라는 것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이같이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악명 높았던 '조지 맥켄지'였기 때문이다. 1691년 이 무덤에 묻힌 '조지 맥켄지'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법무장관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커버넌터(Covenanters)', 즉 장로주의를 주장한 신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해 '피의 맥켄지'라고 불리기까지 했는데, '조지 맥켄지'는 사람들이 가득한 감옥에 불을 지르고 굶겨죽이는 등 매우 잔인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수백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그가 법무장관으로 있었던 시간을 '살육의 시대'라 불렸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에 사람들은 무덤 문이 열리면서 악명 높은 '조지 맥켄지'유령이 잠에서 깨어나 괴롭힌다 생각했다. 결국 사람들은 200년 퇴마사 '콜린 그랜트'에게 공격을 멈추게 해줄것을 부탁한다. 이에 '콜린 그랜트'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악령을 물리치는 의식인 퇴마의식을 실행한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람들은 무덤 옆 교회에서 어두운 형체가 지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하게 된다. 이에 사람들은 '조지 맥켄지'유령이 떠났다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실제로 그 이후, 보이지 않는 공격(미스터리한 공격)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퇴마의식을 거행한 '콜린 그랜트'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공격은 다시 시작된다. 이에 겁에질린 사람들은 무덤의 문을 영원히 잠가 다시 열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결국 에든버러 시는 커버넌터스 감옥을 출음금지 구역으로 선언한다. 그런데, 무덤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된다. 무덤의 문을 다시 연 사람은 사업가 '잔 앤드류 헨더슨'이였다. 그는 '커버넌터스 감옥'무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할 생각을 하고 에든버러 시에 정식 허가를 받는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조지 맥켄지 무덤'을 관광시켜주는 '죽음의 도시투어'를 시작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그 후 '폴터가이스트 현상'들이 다시 나타났고 심지어 그 곳을 투어하다가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사람까지 발생하게된다. 실제로 무덤의 문이 다시 열린 1998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500명 이상이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한 공격'을 받았고 170명이 기절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유령을 믿지 않았던 사업가 '잔 앤드류 헨더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업 시작 후 갑작스러운 화재로 그의 집이 불탔다. 그는 이러한 일과 직접 사람들이 공격당하고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맥켄지 무덤'에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출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헨더슨 책 이외에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후기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조지 맥켄지 무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덤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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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 네페르티티 여왕

1923년 하나의 보물을 두고 이집트 정부와 독일 정부, 두 나라 사이에 대립이 고조되었다. 이집트 정부의 것이니 즉각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이집트 정부와 보물이 운송과정에서 손상우려가 있다며 반환을 거부하는 독일 정부 대표 아돌프 히틀러, 이 보물은 바로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여인의 흉상이었다. 1912년 12월 6일, 이집트 나일강 인근 사막도시 아켈타톤에서 독일의 고고학팀은 이집트 정부의 허가 하에 유적을 발굴 중이었다. 그러던 중 독일의 이집트 전문학자인 루트비히 보르하르트(Ludwing Borchardt)는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루트비히 보르하르트'는 이집트 출입국 관리들의 눈을 피해 흉상을 독일로 밀반출한다.(당시 흉상에 석고를 발라 몰라보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독일로 밀반출된 이 조각상은 1923년 원래 상태로 복원되어 독일 베를린 알테즈 박물관에 전시된다. 기원전 1360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지는 이 조각상은 왼쪽 눈동자가 없는 미완성 상태였지만 매우 섬세하고 정밀하게 조각되어 현대의 미인상에 견주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밝은 갈색 피부,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가늘고 긴목의 형태) 이에 이집트 예술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데, 이 흉상이 바로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이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아낙수나문(Anksnmn)과 함께 고대 이집트 3대 미녀로 꼽히는 네페르티티는 이름의 뜻 '미녀가 왔다.'를 보여주듯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4세기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10대 파라오 아크나톤(Akhnaton, 아멘호테프 4세)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였으며, 파라오 투탕카멘(이집트 제18왕조 12대 파라오, Tutankhamen)의 장모이자 양모로 알려져 있다. 또한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최초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남편인 10대 파라오 아크나톤과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만큼 엄청난 권력을 가졌었다. 그런데 기원전 1367년 홀연히 역사 속 기록에서 사라진다. 뿐만아니라 무덤, 유물, 유적 등 '네페르티티'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네페르티티'의 기록 실종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첫 번째, 아크나톤 왕 14년 이집트에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이때 '네페르티티'가 사망했다는 설.

두 번째, 아크나톤 왕이 사망하고 다음 파라오인 투탕카멘이 즉위하기 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 '스멘카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스멘카레'가 '네페르티티'라는 설.

세 번째, 기원전 1367년 '네페르티티'가 아크나톤 왕의 사랑을 잃고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설.

네 번째, 일신교(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를 도입하는 종교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치적인 이유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독일 베를린 알테즈 박물관에 공개된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은 기이하게도 왼쪽 눈동자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네페르티티' 조각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소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추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하는 등 여러 얼굴로 보였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첫 번째, 고대 이집트 궁중 조각가였던 투트모스가 '네페르티티'를 사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한을 담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미지를 섞어 만들었다는 설.

두 번째, 고대 이집트 궁중 조각가였던 투트모스가 '네페르티티'의 실제 아름다움에 자신이 만든 조각상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조각을 미완성인 상태로 남겨놓았다는 설.

세 번재, '네페르티티'조각상을 밀반출했던 '루트비히 보르하르트(Ludwing Borchardt)'가 밀반출 과정 중 훼손시켰다는 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2003년 영국 요크대학의 '조앤 플레처'교수가 놀라운 주장을 한다. 1898년 프랑스의 이집트 고고학자 '빅터 로렉'이 발견한 7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던 '젊은 여인'이라는 이름이 붙어진 미라가 발견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훼손 상태가 심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미라가 흉상과 유사하다고 느낀 '조앤 플레처'교수가 12년간 미라의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분석한 결과 미라를 싼 천이 당시 왕족들만이 사용한 고급 천이었다는 것과 최상의 약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꺽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미라의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이 있다는 점 등이 흉상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라를 복원해 '네페르티티'의 당시 얼굴을 공개하였는데 아프리카계의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많은 논란이 계속되던 2003년 8월 30일, 이집트 카이로 유물관리 위원회 사무총안 '자히 하와스'는 '조앤 플레처'교수가 '네페르티티'의 미라라고 주장한 미라에 대해서 '네페르티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대 남성의 미라라며 반박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양쪽 귀에 귀걸이 구멍은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했던 풍습이었으며 왕비들은 귀를 뚫지 않고 가발을 이용해서 귀걸이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6번이나 출산을 했다고 알려진 '네페르티티' 여왕이라고 하기엔 이 미라의 골반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네페르티티'는 30세 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미라는 18~30세로 추정되므로 '네페르티티'의 미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진짜 '네페르티티'의 미라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본격화된다. 그 결과 투탕카멘, 아크나톤 등 수많은 미라들에 신원이 밝혀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페르티티'의 진짜 미라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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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 세기의 결혼 이야기

2009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보고있는 이란의 학자....그는 그 책을 보다 깜짝놀란다. 그 책에 내용 중 '바실라'라고 기록된 나라명에서 페르시아의 왕자와 신라의 공주가 혼인을 했다는 내용때문이었다. 1400년 전의 기록인 이 책에는 그 당시에 내용이 세세히 작성되어있었다. 그 책은 바로 '쿠쉬나메'라는 책이었는데, 11세기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가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최초로 7세기부터 전해지던 것을 기록하고 1998년 잘랄 마티니가 현대 이란어로 편찬한 책이었는데,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 '페레이둔'이 자하크를 무찌르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대 서사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그 이야기는 7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의 이란이 있기 전에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은 중국 인근 아름다운 나라 바실라로 망명한다. 그리고 당시 '바실라'는 타이후르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아브틴은 타이후르 왕에게 딸 중 한명인 '파라랑'공주와의 혼인을 청한다.그러자 왕은 서른 명의 공주 중에서 '파라랑' 공주를 단번에 알아 맞추면 혼인을 승낙하겠다고 '아브틴'왕자에게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틴'은 단 번에 '파라랑 공주'를 알아보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페르시아의 왕자와 바실라의 공주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페레이둔'이 적을 무찌르고 전설적인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2010년 이란,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바실라가 통일 신라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이란 국립반장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박사는 한국의 이희수 교수와의 연구 끝에 절반에 달하는 400여편에 달하는 내용이인 바실라라는 곳이 신라라고 말한다.' 즉, 파라랑 공주 역시 신라의 공주이며, 쿠쉬나메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근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사에서 페르시아와 최초의 발견은 고려 현종 15년 페르시아와의 교류로 알려져 왔는데, 이미 그 전에 신라와 페르시아왕 교류가 있었고 두 나라가 혈맹으로 맺어져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기때문이었다. 

(출어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그 첫번 째 근거는, '바실라'에 대한 해석 및 기록

신라 = '더 좋은'

11세기 이전부터 이란의 많은 고서적에 기록된 바실라가 당시 신라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

두번째 근거는

'세르빈 알리 조르바니'가 작성한 '도로와 왕국 총람'에서 '바실라'를 육지와 바다를 끼고 있는 번영한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의 지럭 위치와 일치하며, 900년대에 기록된 이븐 나딤 '세계의 책'에서 역시 금이 많은 나라라고 되어 있는데 신라는 금이 많은 나라로 이는 신라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세버번째 근거는

'신라와 이란의 쌍둥이처럼 닮은 문물이다.'쿠쉬나메에는 신라의 공주 파라랑과 결혼하고 있었던 바실린이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고향에서 많이 하던 말을 타고 하던 공놀이가 나오는데, 한국사에 보면 고려 의종 때 국가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와 비슷한 격구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근거로 페르시아에 아브틴으로 부터 이 놀이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주 괘릉에서 발견된 무인석상에는 높은 코와 깊은 눈, 덥수룩한 수염 머리에 띠를 두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모습뿐아니라 페르시아 왕족의 모습과 흡사했다.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공작 무늬돌에는 새 두마리가 나무를 마주 보고 서있는 입수쌍조문 문양이 들어가있다. 이 역시 전형적인 페르시아에 문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잔이 모양부터 제작 기법까지 이란 그물무늬 유리잔과 닮아있었다.

(출어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뿐만아니라, 아브틴이 바실라에 와서 타이후르왕의 환대를 받으며 입성해 공주와 결혼했다.는 내용이 개운포에 구름과 함께 나타난 용왕의 아들 처용을 헌강왕이 환대하며 서라벌로 데려와 신라의 여인과 혼인시켰다.는 내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용은 880년대 인물로 660년 경에 제작한 쿠쉬나메와는 시기가 맞지 않는 다는 점을 들어 이들에 주장을 반박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처용이 아브틴 이후에 신라로 들어온 또다른 페르시아인으로 타이후르 왕은 헌강왕이 아니라 태종무열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말 말 이들은 신라 시대에 누구였을까? 한편 일각에서는 나를 잃은 페르시아인들이 만든 설화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많은 학자들은 페르시아가 신라와 교역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확한 쿠쉬나메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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