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롬멜의 보물, 그 행방은?

2007년 7월 18일, ‘테리 호지킨슨’이라는 저명한 탐험가가 놀라운 주장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라졌던 일명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에르빈 롬멜’의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육군 원수였던 ‘에르빈 롬멜’은 능수능란한 지휘로 매우 유명했다. 히틀러 최측근인 ‘요제프 괴벨스’는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게 있어 전설적인 존재라고 평가했고, 심지어 상대국이었던 영국의 수상 ‘처칠’ 또한 ‘에르빈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에르빈 롬멜’은 독일군과 연합군에게 존경의 존재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연합군의 계속된 공세로 독일군의 전선이 점점 무너지게 되자 1943년 ‘롬멜’의 전차부대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퇴각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영국의 한 방송은 튀니지의 사하라 사막에서의 전투에서 연합군이 ‘롬멜’의 부대를 전멸했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롬멜’의 정예부대가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에서 섬멸됐다는 것이 알려지자 ‘에르빈 롬멜’의 부대가 사하라 사막에 간 이유에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상당한 양의 보물들을 강탈한 ‘롬멜’과 친위대 사령관 ‘발터 라우프’(튀니지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에게 각종 진귀한 역사적 유물들과 금은보화를 약탈했으며 특히 ‘제르바 섬’의 유대인들에게서는 440파운드의 금괴와 보물들을 강탈했다.), 그들이 수탈한 보물의 양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군이 계속해서 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롬멜’은 강탈한 보물들을 튀니지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옮기려 했지만, 이미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해상까지 모두 장악했음을 알게 되자 ‘롬멜’은 정예부대에게 비밀기지에 보물들을 감출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그가 보물들을 숨기려고 한 장소가 바로 사하라 사막이었고 이로 인해 ‘롬멜’의 정예부대는 군용차 15~20대에 보물들을 싣고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그런데 정예부대가 사하라 사막의 비밀장소에 보물을 성공적으로 싣고 돌아오던 도중 연합군의 공격으로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롬멜’이 히틀러에 의해 숙청을 당하자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의 위치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섬멸당한 정예부대가 ‘롬멜’의 보물을 사하라 사막 어딘가에 숨겼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보물들을 찾으려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사하라 사막으로 몰려온다. 하지만 ‘롬멜’의 보물은 쉽게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1948년 6월, 독일 프랑스영사관에 ‘페터 플라이크’라는 한 남성이 ‘코르시카 섬’의 여행 비자를 신청하는데, ‘페터 플라이크’가 제출한 서류를 보던 영사관 직원은 그가 옛 독일군 친위대 잠수부였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되고 이에 ‘페터 플라이크’를 조사한다. 그리고 곧 ‘페터 플라이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을 듣게 된다. 5년 전인 1943년 9월 ‘페터 플라이크’는 상관으로부터 ‘코르시카 섬’ 근처 바다 속에서 철제 상자 6개를 숨길만한 장소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에 ‘페터 플라이크’는 코르시카 섬 인근 바다 속에서 적당한 동굴을 찾았다. 그 후, 그는 그 지점을 표시해 놓고 다음 날 보트에 철제 상자를 싣고 장교들과 함께 그 동굴로 떠났는데, 철제상자를 숨기는 장교들의 모습을 훔쳐보던 중 그 철제상자들 속에 엄청난 보물이 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그곳에 위치와 특징을 기억해 두었다고 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롬멜의 보물’이 사하라 사막에 숨겨졌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코르시카 섬 근처에 수장됐다는 ‘페터 플라이크’에 새로운 주장에 탐험가들은 이번엔 ‘코르시카 섬’으로 몰려들었고, 심지어 프랑스 정부는 ‘페터 플라이크’에게 협력을 제안하여 인양작업을 실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몇 달 동안 100억 프랑 이상을 들여 전문 잠수부들과 첨단 장비들을 총 동원해 탐색을 했으나 보물들을 찾지 못했다. 결국 ‘페터 플라이크’는 사기죄로 감옥에 구금된다. 그러던 1943년 9월 어느 날 밤, 독일 군인들이 코르시카 섬 근처 바다 속으로 상자들을 빠뜨리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목격자의 진술로 인해 사람들은 ‘페터 플라이크’의 말처럼 ‘롬멜의 보물’이 ‘코르시카 섬’ 인근에 숨겨져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두 달 후, 출옥을 하게 된 ‘페터 플라이크’, 그런데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해변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실종된다. 이에 수색에 나선 경찰들이 그를 끝내 찾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페터 플라이크’의 실종에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등 근거없는 다양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한다. 진실은 미궁에 빠진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1961년, 아일랜드의 한 기자가 과거 실종된 ‘페터 플라이크’에 대한 기사를 쓰던 중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페터 플라이크’가 한 말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기자는 ‘페터 플라이크’가 사기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쓰게 되고 이는 사람들에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기자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발송된다. 이 편지는 바로 ‘페터 플라이크’가 보낸 편지였다. 그후 기자는 ‘페터 플라이크’를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페터 플라이크’는 이탈리아 해군이었으며, 1943년 9월 17일 모터보트에 철제상자 6개를 싣고 장교들과 함께 코르시카섬의 바스티아 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항 전, 상관이 철제상자 속의 물건을 확인하는 것을 훔쳐보고 그것이 ‘롬멜의 보물’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월 19일 목적지 바스티아 항에 도착하자 갑자기 연합군의 집중 폭격이 시작되었고 이에 다급해져 ‘롬멜의 보물’을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터 플라이크’는 당시 ‘롬멜의 보물’을 빠뜨린 지점이 폭파당한 어느 이슬람 사원 건너 편쯤이라고 고백한다. 이후 고들리 기자의 보도로 이 사실은 알려지게 되고, 또 다시 많은 탐험가들이 롬멜의 보물을 찾기 위해 몰려든다. 하지만 롬멜의 보물은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이에 많은 논란이 계속되던 중 2007년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테리 호지킨슨’이 롬멜의 보물은 코르시카 섬의 바스티아에서 1해리도 채 안되는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롬멜의 보물은 화제가 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롬멜의 보물’은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채 미궁속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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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한국 토종견, 동경개(동경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견하면 떠오르는 삼총사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개가 있었다. 그서은 바로 ‘동경개’였다. 2005년 경주 서라벌대학에 재직 중이던 ‘최석규’교수, 그는 경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열람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개 모양의 33점의 토우로 그 중에서 약 50%는 꼬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호기심이 생긴 ‘최석규’교수는 조사에 들어간다. 조사결과 이 개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토종개 ‘동경개’임을 밝혀낸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우람한 체구와 잘 발달된 근육, 44~49cm의 키와 49~52cm의 길이 그리고 14~18kg의 몸무게를 가진 중형견으로 겉으로 보기엔 별로 독특할 것 없는 ‘동경개’는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천적으로 꼬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개의 꼬리는 견종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꼬리가 없는 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꼬리가 없는 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개들은 열성 유전병 증세를 보여 비정상적인 개로 분류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경개’는 대부분이 꼬리가 없음에도 그 어떤 병적 증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동경개’에 대한 기록이 담긴 최초의 문헌은 조선 현종 10년에 출간된 ‘동경잡기’로 동경에 살고 있는 꼬리 짧은 개를 ‘동경구’라 부른다고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경’은 고려시대 삼경 중 하나였던 현대의 경주를 말한다. 즉 ‘동경개’라는 명칭은 경주의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경개’의 명칭에 대한 설명이 최초로 수록된 ‘동경잡기’ 외에도 ‘동경개’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경개’라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사기 제28권 ‘백제 본기’에서도 꼬리 짧은 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는 ‘동경개’가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 살아온 토종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문헌들을 종합하면 ‘동경개’는 후각이 매우 발달했고 민첩성이 뛰어나며 영특하고 용맹스러운 기질을 가졌지만 사람에게는 온순하며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는 ‘증보문헌비보’에 나오는 ‘동경개’에의 남다른 기질에 대한 실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에 살던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동경개’와 함께 한양으로 가던 중 ‘문경새재’에서 병으로 쓰러져 죽고 만다. 그러자 ‘동경개’는 쉬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죽은 곳으로 잡아끌어 안내했다고 한다. 그리고 난 뒤 갑자기 주인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경주에서 문경새재까지 먼 거리를 쉬지도 않고 달린 탓에 기력이 다해버린 것이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와 ‘동경개’를 함께 묻어주었고 후에 무덤의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동경개의 이 같은 충성심과 영특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옛날부터 영특하고 충성스러워 선조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동경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기 시작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때문이었는데, ‘동경개’가 일본의 ‘고마이누’를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왕가나 신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조각상 ‘고마이누’(‘고마이누’는 액운을 쫓기 위해 신사 앞에 놓는 상서로운 짐승)는 예부터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이에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돼 있는 ‘동경개’와 ‘삽살개’ 등 한국에 토종개들이 ‘고마이누’를 닮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이를 참을 수 없어 ‘동경개’들을 죽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총독부 산하 ‘조선원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견피를 연간 10만 장에서 50만 장까지 수집하는 바람에 토종견들의 개체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제의 토종개 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동경개’는 꼬리가 없어 재수가 없는 개로 인식되었고 이런 잘못된 인식으로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경개’를 멀리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잡아먹히기 까지 하는 등 ‘동경개’는 멸종되기 일보직전이 된다. 그런데 이때 멸종의 위기에 다다른 ‘동경개’에게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동경개’를 살리자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동경이보존연구소’가 설립된 것이다. ‘동경이보존연구소’는 ‘동경개’를 보존하고 개체수를 늘리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정부와 지자체 역시 2008년 6월 경주개 ‘동경이’ 선포식을 시작으로 2009년 8월 경주 양동마을을 ‘동경개’ 사육 마을로 지정하는 등 ‘동경개’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리고 2010년 ‘동경개’ 역사상 큰 획이 그어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동경개’가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에 이어 ‘한국 토종견 제4호’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이제 명실상부 ‘동경개’는 ‘토종견’으로서 귀한 몸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경개’의 우수성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사냥견과 화재 경보견 등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주시는 ‘동경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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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동물들에 의해 길러진 야생아이들, 모글리 현상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Romulus)’, ‘로물루스’는 인간이 아닌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에는 이런 일은 신화 또는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1920년 12월 인도에서 놀라운 아이들이 발견되었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던 ‘자알 신그’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축을 잡아먹는 동물을 잡기 위해 사냥꾼들과 숲속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맹수가 살고 있는 법한 곳을 찾아낸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독특한 무언가를 보게 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바로 그들이 본 것은 마치 늑대처럼 공격적으로 덤비는 2살과 7살가량의 여자 아이들이었다. 그물로 이 여자 아이들을 잡은 ‘자알 신그’는 자신의 고아원으로 여자 아이들을 데려와 각각 ‘아말라’&‘카말라’라는 이름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적응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만 인간이었고 행동이나 생활방식이 늑대와 다를 것이 없던 ‘아말라’&‘카말라’는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늑대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또한 밝은 곳은 피하고 어두운 곳에서만 생활하려했다. 그리고 익힌 고기 대신 날고기만 먹었으며, 옷을 입혀주면 번번이 바로 찢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던 중 구출된 지 1년이 채 못돼서 동생 ‘아말라’가 사망한다. 동생 ‘아말라’가 죽자 언니 ‘카말라’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자알 신그’의 1년 반 동안의 끈질긴 교육 끝에 ‘카말라’가 직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잘 고쳐지지 않던 ‘카말라’의 언어능력이 9년 후에는 유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카말라’는 갑자기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후, 늑대소녀 ‘아말라’&‘카말라’의 이야기는 학계에 보고되었고, 이는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학자들은 이러한 사례를 ‘모글리 현상’이라 칭했다. ‘모글리 현상’이란, 영국의 작가 ‘J.R.커플링’이 쓴 동화 ‘정글북’에 등장하는 늑대에 의해 길러진 어린 아이와 같이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야생동물에 의해 길러진 아이들이 해당 동물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모글리 현상’을 보인 아이들은 1920년 이후에도 약 80여 명이 더 발견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글리 현상’을 통해 학자들은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며, 인간의 형성과 발달은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결정적 시기’란? 생리적으로 인간의 언어와 행동발달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특정한 시기를 일컫는데, 만약 이 시기를 넘기게 되면 언어와 행동을 익히기 매우 힘들다고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결정적 시기’는 생후 약 2년~사춘기가 끝날 때까지 라고 하는데, 사춘기 이후에는 뇌 속에서의 신경생리학적인 기능배치에 따라 좌우반구의 역할이 굳어지고 언어습득 장치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자국어를 쉽게 익힐 수 있는 ‘결정적 시기’를 놓치게 되면 언어능력이 상실되어 교육을 하더라도 익힐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연구결과가 나온다. ‘모글리 현상’을 연구했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결정적 시기’에는 필히 ‘애착’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착’이란 출생 후부터 영유아기에 걸쳐 특정한 인간과 만들어지는 아주 끈끈한 심리적(정서적)인 유대감을 말하는데, 아무리 결정적 시기에 이루어지는 훈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정적 시기’에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애착’을 못 느끼면 사람의 언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학계에서는 ‘애착 관계’가 결여되어 발생하는 현대판 ‘모글리 현상’에 주목했다. 실제로 2008년 3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러시아의 한 마을 주민들이 이웃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나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이를 경찰에 제보한다. 이에 제보를 받은 집을 찾아간 경찰들은 집 주인과 대화를 하던 중 기괴한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찰들은 기괴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곳에는 새집이 있었는데, 그 새집 안에 한 어린 소년이 갇혀있었던 것이다. 이에 경찰들이 아이를 새장에서 빼내려하자 소년은 새가 부리로 공격하는 것 같이 경찰들의 손을 입으로 쪼며 새처럼 소리를 냈다. 즉, 그 기괴한 소리는 바로 이웃주민들이 제보한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어린 소년은 태어나서 한 번도 새장을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7년 전 소년을 낳은 어머니는 미혼모였기에 아이의 존재를 밝힐 수 없어 고민에 빠졌는데,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우연히 보인 새장, 그녀는 그 새장에 어린 아이를 가두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새장에 갇힌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이나 관심을 못 받은 채 새장의 새와 7년을 보내며 새의 소리와 행동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소년은 구출된 이후에도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으며 익숙해져 버린 새와 새장을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다. 2009년 5월 시베리아의 한 마을에서 계속된 악취로 화가 난 이웃 주민들이 악취가 풍기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광경은 놀라웠다. 더러운 집안에 사람들은 만취해 있었고 바닥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오물을 온 몸에 묻히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는데, 이 소녀는 음식을 땅에 던져줘야 먹었으며 말 대신에 개와 같이 짖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어 다니는 등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들며 학자들은 부모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애착 없이 방치된다면 ‘모글리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심각성을 경고했다. 그리고 야생에 버려져 동물과 생활했거나 결정적 시기를 놓친 아이들을 야생아이들(Feral Child)이라 명명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학자들은 한 번 인간에게 버려지거나 방치되어 야생의 습관을 갖게 된 아이들은 구조 후에도 변화된 환경으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다가 참지 못하고 탈출을 하거나 힘겹게 인간생활을 습득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뿐만 아니라 ‘야생아이들’은 구조된 이후 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유 없이 사망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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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고대 암벽도시 페트라, 고대도시

 1812년 요르단의 사막 한 가운데 거대한 절벽 사이를 지나가는 아랍인으로 위장한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오래전 역사 속에 사라진 '고대 도시'를 찾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험난한 협곡 끝에서 사막의 암벽도시 ‘페트라’를 찾고만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기준으로 서남쪽으로 15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도시 ‘페트라’, ‘페트라’로 가기 위해서는 요르단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거대한 협곡 지대 ‘와디무집’을 지나야만 한다. 약 70m의 이 엄처난 협곡 지대는 오랜 시간동안의 지진과 침식의 결과물로, 사해로 들어가는 협곡이다. 이러한 척박한 사막에 세워진 고대 암벽도시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198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암벽도시 ‘페트라’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페트라’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고작 2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19세기, 스위스 출신의 탐험가이자, ‘아프리카내륙탐사추진협회’의 회원이었던 ‘부르크하르트’가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탐험 대신 회교도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의 탐사를 계획한다. 그렇지만 ‘아프리카내륙탐사추진협회’는 ‘부르크하르트’의 ‘메카’ 탐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서양에서 파견된 기독교인 탐험가들이 회교권을 여행하다가 살해를 당하거나 탐험을 포기하고 돌아오기 일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크하르트’는 아랍어&코란을 심히 공부하는가하면, 수염을 기르는 등 아랍인들의 생활양식을 수행하며 열심히 준비를 한다. 왜냐하면 회교도를 가장하다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들키게 되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에 감탄한 협회는 마침내 ‘부르크하르트’에게 회교권 지역 탐험을 허락한다. 이렇게 탐사를 시작하게 된 ‘부르크하르트’는 1812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던던 중 상인들로부터 고대도시 ‘페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호기심을 가진 그는 ‘페트라’를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되지만 ‘페트라’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왜냐하면 '페트라'가 외부에선 입구도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 암석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폭 2m, 길이 1.2km에 이르는 절벽 사이에 있는데, 이 길은 협곡이라는 뜻의 아랍어 ‘시크(Siq)’라고 불린다. 오랜 세월동안 지각변동으로 벌어진 바위 틈새 덕분에 ‘페트라’는 천혜의 요새가 된 것이다. 결국 이 길을 찾은 ‘부르크하르트’가 길을 통과해 ‘페트라’를 보고 매우 놀라는데, 그곳이 1,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고대도시 ‘페트라’는 주거시설, 목욕탕, 극장, 시장, 무덤, 상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인구 30,000명이 거주하던 고대 도시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페트라’의 모든 건물이 ‘조각’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건축물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인 것이다. 높이 39m, 너비 28m에 이르는 거대한 장밋빛 사암, 이 암석을 통째로 조각한 ‘알 카즈네 신전’은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것이다. ‘페트라’는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바위덩이인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 페트라’, 그럼 과연 누가 언제 만든 것일까?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2,000여 년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는 향료의 수요가 높아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향료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중 아랍계 유목인 ‘나바테아인’들은 사막에서 상인활동을 하며 아라비아 일대의 무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라비아 남부의 향료나 인도의 후추 등을 아라비아 북부로 운송하던 강력한 상인 집단이었다. 활발한 활동으로 시리아와 이라크 서부 등까지 세력을 확장한 ‘나바테아인’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한다.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이자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역의 중심지에 만든 요새 도시 ‘페트라’였다. 사막을 건너다녀야 했던 상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도시 ‘페트라’는 척박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였고 난폭한 도적이나 짐승들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안전 지역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막 여행으로 지친 상인들은 모두 ‘페트라’를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었다.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를 거쳐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했다. 상품가격의 무려 25%에 달한 통행세 덕분에 ‘나바테아인’들은 점점 부를 축적해나간다. 대상무역이 활발해지고 천연의 요새라는 이점까지 갖춘 ‘페트라’는 교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무역을 하는 유목민족 ‘나바테아인’들이 어떻게 암벽에 도시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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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천장에 난 구멍이었다. 페트라는 바위의 정면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 내리면서 공간을 만든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은 건물을 지을 바위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깍은 뒤, 그 위에 정교한 설계도를 그렸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 내려 간 것이다. ‘페트라’의 대표적인 건물인 ‘알 카즈네 신전’ 역시 바위에 윗부분에 수직으로 관통하는 구멍을 뚫어 아래로 내려가면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왜 만들었을까? ‘나바테아인’들의 삶은 바위에서 태어나 바위에서 살다가 바위에서 죽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바위자체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에게 바위 속에 매장 된다는 것은 신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죽은 사람 역시 바위를 깎아 그 안에 매장했다. 일일이 바위를 조각해 만든 ‘페트라’에 건물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 800여 개에 달하지만 이는 ‘페트라’전체의 1/4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 인구 30,000명의 도시 ‘페트라’가 엄청난 인원과 시간이 소요되는 ‘페트라’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나바테아인’들이 건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페트라를 짓기 위해 이집트가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기원전 2800여 년 전부터 피라미드를 건축한 이집트의 인력과 기술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페트라’의 건물들에 붙은 이름들 때문이다. 신전 ‘알 카즈네’는 보물창고라는 뜻의 아랍어인데,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보물을 숨겨뒀다는 이야기에 근원한다. 또 다른 신전인 ‘카스르알빈트피라움’은 ‘파라오 딸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곳이 오래전부터 문화적으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페트라’의 한 가운데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 건축 양식인 탑문을 갖고 있으며 이 건물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시집간 딸을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페트라’가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지어졌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30,000명이 마실 식수를 어떻게 공급했냐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페트라’는 1년동에 강수량이 10~15cm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물이 부족한 지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도시 곳곳에 연결된 '수로'였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오목하게 깎아서 빗물을 저하는 곳간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물 창고가 먼 곳의 샘에서 물을 끌어들였는데, 대략 반경 25km 이내의 모든 샘물들이 이 수로를 통해 ‘페트라’의 수원으로 사용되었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물들은 각 가정의 부엌들로 이어지는 것이다. 완벽한 물 이동 통로와 암벽으로 둘러싸인 암벽 도시 ‘페트라’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속도의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세기에 접어들면서 '페트라'는 역사적 전환점에 맞딱드인다. 그것은 바로 당시 거대제국을 건설 중이던 로마에게 ‘페트라’의 존재가 거슬린 것이다. 험난한 암벽으로 막힌 천연의 요새 ‘페트라’는 난공불락이었기에 로마는 새로운 대책을고심하게 된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바로 ‘페트라’의 수로를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페트라'는 고된 식수난을 겪다가, 결국 서기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Trajanus)’황제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서기 363년과 551년 두 번의 대 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페트라’의 대부분을 망가져 버렸다. 뿐만아니라 전염병까지 돌자 거주민들은 ‘페트라’를 떠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페트라’는 서서히 붕괴되고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진 도시가 됐다. (‘페트라’의 마지막 기록은 6세기경의 파피루스 뭉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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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미스테리 호박방, 그 존재는?

 방 전체를 모두 보석 중의 하나인 ‘호박’으로 꾸며져 있는 ‘호박방’. 기록에 의하면 다양한 색상의 호박이 벽은 물론 천장까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고 한다. 무려 약 6톤의 호박으로 꾸며진 ‘호박방’은 러시아 황실의 부와 권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박방이' 1941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데, 2003년 5월, 재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도시 건설 3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역사적인 도시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기념식 준비 위원장을 맡았으며, 세계 47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열흘 간의 축제 기간 동안 세상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취를 감춘지 62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되어 공개된 ‘호박방’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빈틈없이 방 전체가 호박으로 가득 채워진 이 황금빛깔의 ‘호박방’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예술성덕분에 세계 정상들의 눈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호박방’이 완전하게 복원되었음을 정식적으로 발표한다. 그는 47개국 대표 중 유일하게 독일 총리와 둘이 '호박방'의 문을 열었는데, 그 이유는 ‘호박방’이 러시아&독일의 깊은 역사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호박방’외교는 약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호박방’은 원래 러시아가 아닌 독일에 있었다. 18세기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왕비 '소피 샤를루트'를 위해 베를린에 있던 성을 재건축한다. 그리고 화려한 장식을 좋아했던 ‘프리드리히 1세’는 궁전의 방 중에서 하나를 보석 ‘호박’으로 꾸미기로 한다. 그러나 완공 되기 전 왕비가 사망하고 1713년 ‘프리드리히 1세’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빌헬름 1세’는 ‘호박방’의 건설을 중단시킨다. 그런데, 이 ‘호박방’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였다. 당시 표트르 1세는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매우 유명했다. '표트르 1세'는 서구에 비해 크게 뒤져있던 러시아에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특히 뿌리깊이 박혀있던 사회관습에 개혁을 실시했다. 그 예로 '표트르 1세'는 귀족의 상징이었던 수염을 잘랐고 굳이 수염을 지키고자 하는 귀족들에게는 ‘수염세’라는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렇게 1년간 모은 ‘수염세’는 새로운 함대를 만드는 자금으로 쓰였다. 그리고 외국어를 익히지 못한 귀족들은 신분을 박탈했다. ‘표트르 1세’가 이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한 것은 당시 러시아와는 달리, 발전한 서유럽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신분을 숨긴 채 서유럽에서 유학을 했으며, 유럽의 박물관, 대학, 천문대 등을 견학했으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직접 배를 만드는 작업을 직접 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유럽의 발전된 문화에 빠져있었던 ‘표트르 1세’를 사로잡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본 '호박방'이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 황실에도 ‘호박방’이 있다면 유럽 못지 않은 명성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직접 지으려니 예산이 너무 많이 들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때 ‘표트르 1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러시아 근위대를 달라고 수 차례 요청할 정도로 마음에 러시아 근위대를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빌헬름 1세’에게 자연스럽게 ‘호박방’에 대한 호감을 흘렸는데, 1716년 ‘빌헬름 1세’는 우정의 표시로 호박방을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다. 그러자 ‘호박방’을 선물한 것에 감동한 ‘표트르 1세’는 즉시 러시아 근위대 55명을 ‘빌헬름 1세’에게 보내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러시아와 독일의 우의를 상징하는 ‘호박방 외교’였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호박은 1천만 년에서 수억 년에 걸쳐 침엽수에서 나온 송진이 화석화된 유기물 보석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호박의 내부에서는 고생대의 작은 동물들과 꽃씨, 나뭇잎 등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호박은 고생대 연구에 귀중한 자원으로서 멸종된 곤충과 식물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호박은 아름다운 빛깔 덕분에 오래전부터 다양한 장신구로 활용되어왔었는데, 호박으로 만든 귀걸이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호박을 이용한 반지와 조각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종교적 행사 때 호박을 태워 신성스러움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러시아 민화에서는 호박이 병을 치료해주고 장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어 '신비의 돌'로 불렸었다. 오래전부터 진귀한 보석으로서 인간의 사랑을 받았던 ‘호박’, 이 호박으로 방 전체를 장식한 ‘호박방’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궁전에 있다가, 17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예카테리나 궁'으로 이전된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호박방의 수난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독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한다. 그러자 소련은 독일군의 침탈을 피하기 위해 궁전의 소장품들을 시베리아 지역으로 옮겼는데, 안타깝게도 호박방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옮기지 못한다. 방 전체에 큰 덩어리로 부착된 호박들을 떼분해하는 것이 어려웠고 호박의 강도가 너무 약해 손상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호박방이 있던 예카테리나 궁전을 장악한 독일군은 36시간 만에 약 6톤에 달하는 호박들을 잘라서 가져가버린다. 이후, 독일이 가져간 호박방은 당시 독일령이었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의 성 안에 장식되어 소장품 번호 200이라는 숫자로 전시된다. 그런데, 1945년 4월 쾨니히스베르크 성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폭격과 함께 호박방은 모습을 감추고 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중심으로 호박방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파괴된 쾨니히스베르크 성의 잿더미 속에서 호박방의 일부 조각들이 발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호박방이 폭격으로 인해 소멸됐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독일군이 호박방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긴 어렵기 때문에 호박방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 벙커’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오랫동안 호박방의 행방을 추적한 독일 사학자 '한스 슈타델만'은 분명히 옛 동독 땅 또는 쾨니히스베르크 어딘가에 호박방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독일과 체코의 국경마을인 ‘도이치노이도르프’에서는 호박방의 장식에 쓰였다는 금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자 도이치노이도르프 시장은 인공 동굴의 지하 20m지점에 금으로 추정되는 금속이 약 2톤 정도 묻혀 있으며 러시아 황실의 호박방을 장식한 금과 호박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추측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다른 보물들과 함께 제3국에 비밀 매장됐다는 것이다. 최대 2억 5천만 달러로 추정되는 진짜 호박방을 찾기 위해 보물 사냥꾼들은 세계 곳곳의 감옥과 벙커, 동굴들을 뒤지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호박방의 진품은 1997년 독일 베를린 여성이 신고한 서랍장 하나와 브레멘 경매시장에 등장한 ‘모자이크 패널’ 등 두 점 뿐이다. 결과적으로 호박방의 진품 찾기에 실패한 소련은 1979년 호박방을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한 복원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거기에 1991년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 해체되면서 복원 작업이 완전히 중단되고 만다. 이렇게 좌초된 호박방 복원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도와준 건 독일이었다. 1999년, 독일의 가스 수입회사인 ‘루르가스’가 호박방 복원을 위해 3백 50만 달러를 기증한 것이다. 독일의 도움으로 박차를 가한 '호박방' 복원사업에는 약 50여 명의 호박 공예 전문가들이 참가하였는데, 전문가들은 50만 개에 달하는 호박 조각들을 짜 맞췄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을 이용한 정밀한 세공과 조각작업으로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호박방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유일하게 남아있던 흑백 사진에 명암을 부활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렇게 1979년부터 시작한 '호박방' 복원작업은 자료조사와 옛 기술 재현에만 11년이 걸렸으며 총 24년에 걸쳐 110억 원이 투입됐다. 그리고 2003년 6월 사라진지 62년 만에 호박방은 새롭게 복원된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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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불가사의한 지하도시, '데린쿠유'&'마트마타'

1960년 터키 ‘카파도키아’, 도망치는 닭을 쫓던 농부가 쫓던 닭이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구멍 속으로 들어간 닭이 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농부는 닭이 들어간 구멍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농부는 구멍 안으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던 중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매우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상상조차 어려운 놀라운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계단과 이어져 있었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간 곳에는 가축을 키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물 사육장에는 또 다른 어딘가로 가는 길이 있었고 그 통로의 끝의 장소에서는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아있는 부엌이었다. 부엌에도 역시나 다른 공간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고, 그곳에는 학교, 침실, 식량창고, 교회 뿐만 아니라 감옥처럼 보이는 장소까지 발견됐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즉, 농부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지하도시’였던 것 이다. 이렇게 지하세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이 ‘지하도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지하도시’는 마치 개미집처럼 상하좌우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밑으로 20층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하도시’는 무려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후에 학자들은 이 지하도시의 이름을 터키어로 ‘깊은 우물(Derinkuyu)’이라는 뜻의 ‘데린쿠유’라고 명명하고 이 ‘지하도시’에서의 생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터키공화국이 설립되던 1923년까지 ‘데린쿠유’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했는데, 학자들은 햇빛도 전혀 없고 공기 또한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시’에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작은 환기구 구멍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지하도시’에서 발견된 환기구 구멍은 총 54개로 수직으로 파진 80m의 중심 환기구로 공기가 들어오며, 중심 환기구와 연결되어 있는 보조 환기구를 통해서 각각의 방으로 공기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낮은 층에서도 맑은 공기가 유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환기를 위해 ‘지하도시’를 수직구조로 만들어 공기가 잘 통하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축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생활공간을 조성하여 생활한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학자들은 이 ‘지하도시’는 기독교가 박해 받던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했다. 처음에는 도망쳐온 몇 명의 사람들이 지하로 들어가 생활하다가 점차 그 숫자가 많아지자 더 크고 넓은 공간을 가지기 위해 옆으로 지하로 계속 파들어 갔고 현재 지금의 복잡한 미로 형태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문을 통로마다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통로를 미로처럼 여러 갈래 뚫어 침입자가 길을 잃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13세기 칭기즈칸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에도 ‘지하도시’는 입구를 봉쇄함으로서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학자들은 ‘데린쿠유’를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난공사라고 표현하며 아무런 장비도 없이 평균 7~80m의 지하에 수 십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린쿠유’에 지하도시를 건설하려면 적어도 300여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외부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내부에 들어와도 미로 속에 갇혀 버릴 것 같은 지하도시 ‘데린쿠유’.

그리고 ‘데린쿠유’가 세상에 알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미스테리한 ‘지하세계’가 모습을 나타낸다. 1969년, 튀니지에 무려 22일 동안이나 폭우가 쏟아졌었는데, 한 남자가 자신의 마을이 물에 잠겼다며 구조요청을 한다. 이로 인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게 된 ‘지하세계’, 그것은 세계 최대의 지하마을 ‘마트마타’였다. 모습을 드러낸 ‘마트마타(Matmata)’는 거대한 웅덩이의 벽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은 특이한 형태의 마을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마을이 생긴 것이 무려 천 년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학자들은 약 7000년 전, 이 곳 사람들의 선조들이 이곳에 이주를 해 왔으며,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 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지하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땅을 거대한 우물처럼 깊게 파기 시작했고, 깊이 판 웅덩이의 벽에 인공 동굴과 같은 구멍을 파서 각각의 방을 만든 후, 그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를 파서 하나의 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집을 완성한 ‘마트마타’에 사람들은 매년 봄 마을 북쪽으로 가서 일 년치에 식량을 구해 온 뒤, 창고에 식량을 보관해 생활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하에 만들어진 마을에 비가 조금이라 많이 내리면 잠길 위험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집의 형태를 1층과 2층으로 나눠서 만들었고 1층이 잠기더라도 자신들의 식량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2층에 식량창고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런데, 이 신비로운 마을에 유난히 관심을 가졌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스타워즈에 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였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마트마타’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몇 천년 전에 지어진 지하마을이 먼 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진 영화 속 집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마트마타’는 더욱 유명해져 관광지로 발전했고 지하마을에 일부는 호텔로 운영되어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그 영화는 1977~2005년까지 시리즈물로 제작되며 미국 SF영화의 시초가 된 <스타워즈>였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스타워즈 에피소드4 - 새로운 희망’에서 주인공 ‘루크’가 살았던 집의 배경이 된 곳이 ‘마트마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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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멸종된 동물들, 그 이유와 종류는?

 1712년, 남아프리카 남서부에 케이프 지대를 여행하고 있던 천문학자 ‘피터 폴브’ 그는 놀라운 것을 목견한다. 그에 눈 앞 푸른빛을 내뿜는 네 발 달린 짐승이 있었던 것이다. 판타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푸른빛의 동물, 학자들은 현실적으로 파란색의 포유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약육강식 세계에서 파란색은 너무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띄는 색은 먹이 사슬의 세계에서 매우 불리하다. 따라서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해온 포유류는 자신을 숨기기 편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터 콜브’가 목격한 파란 짐승은 허상이 아니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피터 콜브’가 목격한 것, 그것은 ‘파란 영양(Blue buck, Hippotragus Leocophaeus)’, 부드러운 풀을 주식으로 했던 초식동물의 새, 초원이 발달했던 남아프리카 남서부 케이프 지역에서 서식했으나 개체수가 많지 않아 매우 희귀한 동물로 이었다. 헌데 1652년 ‘파란영양’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 바로, 네덜란드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건설하면서 많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정착을 시작했는데, 목축업과 낙농업을 하기 위해 양&소를 데리고 온 것이다. 이로 인해 ‘파란 영양’은 새로 유입된 초식동물들과 먹이 경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들이 먹이를 주었던 양&소 등의 가축에 비해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했던 ‘파란 영양(Blue buck)’. 결국 ‘파란 영양’은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냥꾼들의 무차별적인 사냥이었다. 사냥꾼들이 ‘파란 영양’을 사냥했던 주된 이유는 희소성이 높은 파란 빛깔의 모피를 구하기 위해 ‘파란 영양’을 사냥했기 때문이었다. 푸른빛을 내뿜는 ‘파란 영양’의 그 신비롭고 아름다움이 ‘파란 영양’을 멸종케 한 것이다. 안 그래도 먹이 경쟁에 밀려 개체수가 현격히 줄어들던 ‘파란 영양’은 인간들의 사냥으로 그 씨가 말랐고 1800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파란 영양’이 총에 맞으면서 멸종되고 만다. 현재, ‘파란 영양’의 유해는 유럽의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즉, 과거에 존재했었던 ‘파란 영양’은 지금은 볼 수 없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1741년 11월 독일의 박물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는 러시아 제국의 캄차카 반도를 탐사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 조난당한다. 그리고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무인도, ‘베링 섬’에 표류하게 되는데, 그러던 중 뭔가를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8m가 넘는 거대한 덩치의 물고기였다.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는 이 엄청난 크기의 고기를 잡아서 선원들과 나눠 먹었는데 한 마리에서 나온 양이 무려 3t으로 선원들이 며 칠 동안 마음껏 먹어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맛도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그렇게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 일행은 배고픔을 이겨내고 섬을 탈출했는데, 그들을 아사의 위기에서 구해줬던 그 고기는 바다소의 일종으로 후에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반영해 ‘스텔러 바다소(Steller's Sea Cow, Hydrodamalis gigas)’라 명명했다. ‘스텔러 바다소’, 북태평양 베링 해에서 서식하는 포유류로 길이 8m, 체종 12t에 달하는 바다소 종류 중 가장 크고 무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에 살지만 잠수하지 못하는 ‘스텔러 바다소(Steller's Sea Cow)’는 몸을 물 밖에 내놓은 상태로 바다를 감돌며 얕은 여울의 다시마를 뜯어 먹고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된 ‘스텔라 바다소’, 베링 섬에서 벗어나 귀환한 캄차카 탐험대의 조난 일화가 알려지면서 캄차카 인근의 상인과 사냥꾼들이 ‘스텔러 바다소’의 고기와 지방, 모피를 노리고 남획을 시작한 것이다. ‘스텔러 바다소’는 동작이 느리고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는데, 특히 동료가 살해당하면 이를 도우려는 듯 주위로 몰려들어 사냥하기 쉬웠다고 한다. 결국 무자비한 사냥으로 1768년 박물학자 ‘이반 포포프’의 “아직 2~3마리의 ‘스텔러 바다소’가 남아있었는데 죽였다.”라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스텔러 바다소’는 사라졌다. 발견된 지 불과 27년 만의 멸종이었던 것이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그리고 마다가스타르 앞바다 ‘모리셔스 섬’ 인근에서 살았던 몸무게 23kg의 청회색 깃털과 특이한 부리를 가졌던 새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새는 큰 날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날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지 못하는 이 새에게 포르투칼어로 바보, 얼간이를 뜻하는 ‘dod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 ‘도도새(Dodo bird, Raphus Cucullatus)’가 날지 못하게 된 것은 모리셔스 섬에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모리셔스 섬은 새들의 천국이었는데 초식성으로 과실을 주로 먹었던 ‘도도새’는 굳이 날지 않아도 ‘모리셔스 섬(Mauritius)’에 지천으로 널린 과실나무에서 먹이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적의 위험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날개 짓을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천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날 필요가 없었던 ‘도도새’의 날개는 더위를 쫓는 용도로만 쓰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도도새’의 낙원이었던 ‘모리셔스 섬’, 하지만 대항해 시대 1505년 포르투칼 선원들이 ‘모리셔스 섬’에 상륙한다. 그들은 오랜 항해로 인한 체력소모를 ‘도도새’를 통해 보충하려 했고 날지 못했던 ‘도도새’는 잡힐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모리셔스 섬’이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죄수들의 귀향소로 지정되면서 죄수들과 함께 섬에 들어온 다양한 동물들이 ‘도도새’의 알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1681년 영국인 ‘벤자민 해리’가 마지막 ‘도도새’를 목격하는데 이마저도 사냥꾼에 의해 죽으면서 ‘도도새’는 멸종하고 만다. 인간들에 의해 발견된지 150년 만의 멸종이었다. 불과 150년 만에 실존했던 ‘도도새’가 역사 속 생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도도새’의 멸종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1992년 브라질 리우 환경위에서 충격적인 발표가 보고되는데, 바로 ‘모리셔스 섬’의 ‘카바리아 나무’가 더 이상 번식하지 않고 희귀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셔스 섬’에는 13그루의 ‘카바리아 나무’가 있었는데 13그루 전부 다 수명이 300살이었다. 즉, 300여 년 전에 성장을 멈췄다는 것이다. 이에 학자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카바리아 나무’가 수명을 다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멸종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바로 ‘카바리아 나무’가 멸종에 처한 이유를 조사한다. 그 결과 이유는 ‘도도새의 멸종’이었다. 학자들은 ‘카바리아 나무’가 스스로 번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카바리아 나무’가 번식하려면 새의 소화기관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를 ‘도도새’가 해주었다는 것이다. ‘도도새’는 ‘카바리아 나무’에 열매를 먹고 살았고 열매를 소화시켜 배설하면서 씨앗을 옮기고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카바리아 나무’에 번식을 도왔다. 즉, 공생 관계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도도새’의 멸종으로 멸종의 위기에 처한 ‘카바리아 나무’는 ‘도도나무’로 불리게 되었는데, 한 종의 생물이 사라진 뒤 300년이 흐른 뒤 밝혀진 놀라운 사실, 300년 전 사라진 생물이 현재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룡이 기후변화로 멸망하기까지 걸린 시간 1억 5천만년,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생물들이(오록스, 훗카이도 늑대, 스테고돈, 바바리 사자, 카스피 호랑이, 시리아 코끼리, 일본 늑대, 주머니 늑대 등)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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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 공국, 그 정체는 무엇인가?

2007년 1월 8일, 영국의 한 일간지에 황당한 광고 하나가 게재되는데, 사생활 보장과 지위 승격!을 내건 파격적인 내용의 이 광고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매우 황당하고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이 광고에 실린 판매 물품 때문이었다. 신문에 실린 판매 물품의 이름은 ‘시랜드(Sealand)’,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시랜드’가 군주제 국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광고 문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 돈 약 45,000원을 내면 ‘시랜드 공국(The Principality of Sealand)’에서 인정하는 백작신분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광고 내용으로 인해 이 광고 한 장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분위기로 인해 언론에서도 ‘시랜드 공국’에 실체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당시 광고에 표시된 ‘시랜드 공국’은 북위 51° 53’ 40’’ 동경 1° 28’ 57’’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위치는 에식스 주의 ‘하리치항’으로부터 11km 떨어져 있는 바다 위였다. 이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영해에서 포착되는 섬을 위주로 샅샅이 뒤졌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정말로 ‘시랜드 공국’으로 추정되는 조그마한 뭔가가 포착됐다. 언뜻 보기에 섬처럼 보인 ‘시랜드 공국’은 사실 2개의 원통형 구조물이 영토를 대신하는 플랫폼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위에 주거가 가능한 건물 & 헬리콥터 착륙장을 건설한 뒤 국기를 세워놓은 약 166평 정도의 구조물이었다. 그곳에는 당시 2명의 군인과 공작 1명 그리고 백작 1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 '시랜드 공국'에는 통치자까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패디 로이 베이츠’였다. 그러면 이 시랜드 공국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시랜드 공국’의 탄생배경은 1942년 시작된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영국,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동부해안에 해상벙커를 설치하였는데, 이 해상벙커에는 150~300명 정도의 병력이 상시 거주하며 작전에 합류했었다. 이렇게 이 해상벙커는 전쟁의 요새로 쓰이다가 1945년 종전이 되자 그 기능을 잃고 버려졌다. 헌데 22년 뒤에 ‘패디 로이 베이츠’가 사람들 앞에서 이 해상벙커를 ‘시랜드’라고 명명한 뒤 한 나라로서 독립한다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한것이다. ‘패디 로이 베이츠’는 해상 벙커가 만들어질 당시에 영국에 육군 소령이었다. 그런데 전역을 하고 라디오 해적 방송을 운영하고 있던 ‘패디 로이 베이츠’는 어느 날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해상벙커를 생각하게된다. 그리고 그는 이 해상벙커가 영국령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해상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영국 법적으로 규제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영국 해군이 지어 이용했었던 해상벙커를 ‘시랜드 공국’이라고 명명한 뒤, 자신 스스로 ‘시랜드 공국’의 통치자라 정한 것이다. 그리고 ‘패디 로이 베이츠’자신의 신분을 공작으로 바꾼 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였다. 그리고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시랜드 공국'의 백성으로 두었던 것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시랜드 공국'에 건물을 살펴보면 10여 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있는데, ‘시랜드 공국’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시랜드 공국'의 신분증이 발행되어 있으며, 신분증이 발급된 사람들은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화폐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우표로 외부와 간단한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인은 ‘시랜드 공국’에 출입 시 반드시 여권확인을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었는데, 만약 위의 규제를 어길 시에는 이에 합당한 처분이 주어진다. 그리고 '시랜드 공국'은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선발하여 독립국으로서 의지를 다지는 등 한 나라로서 갖춰야 할 조건들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어느 날, 영국 해군이 해상벙커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랜드 공국’ 사람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영군 해군에게 총알이 날라온다. 당시 ‘시랜드 공국’의 경비를 섰던 '패디 로이 베이츠'의 아들인 '마이클'이 영국 해군을 발견하고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영국 해군은 ‘시랜드 공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 한 뒤 '시랜드 공국'의 사람들을 강제퇴거 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영국해군의 생각되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랜드는 영국 영해 밖 공해에 있기 때문에 영국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다.”라며 영국 법정에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 지도 어디에도 ‘시랜드 공국’은 표기되지 않는다. ‘시랜드 공화국’ 사람들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시랜드 공화국’은 세계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한 나라가 없다. 즉, ‘시랜드 공화국’은 현재 존재하지만 국가로는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랜드 공국’에서는 황당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8년 독일 출신의 사업가가 ‘시랜드 공국’을 방문했다가 마음대로 '시랜드 공국'을 검거(점령)한 것이다. 이에 시랜드 국민 전체가 합심하여 그들을 제압한 뒤 사업가를 붙잡아 포로로 선포한다. 그리고나서 '시랜드 공화국'은 독일과 포로 협상을 벌였다. '시랜드 공국'에서는 이 사건을 ‘외자의 난’이라 칭하는데 이 일은 ‘시랜드 공국’ 역사에서 중요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패디 로이 베이츠’는 아들 ‘마이클’에게 통치권을 승계한 뒤 ‘시랜드 공국’을 떠나버렸다. 한편, 마이클은 국민들에게 ‘시랜드 공화국’의 발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시랜드 공국’은 영국과 영해권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싸움이 계속되어 마찰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시랜드 공화국’에서 발행된 여권이 범죄자들에게 이용되는데,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시랜드’의 존재가 엄청난 문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영국과의 대립은이 빈번해지자 ‘시랜드 공국’의 국민들은 '시랜드 공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2006년에는 ‘시랜드 공국’에 전기를 공급하는 기계에 불이나 국민들 중 일부가 사망했으며, 지금은 경제적 문제로 힘들어져 통치자와 단 한 명의 백작만 남아있는 상태다. 계속된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자 2007년, ‘시랜드 공국’은 결국 약 1,200억 원에 '시랜드 공화국'을 판매 물품으로 내놓았다. 이에 실제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이 ‘시랜드 공화국’을 사려하였는데, 교통수단이 불편하다고 접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래를 취소한바 있다. 아직도 ‘시랜드 공국’은 자기네 정부가 승인한 신분 작위를 판매하고 있으며 ‘시랜드 공국’을 매입 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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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라오콘 군상, 라오콘의 비밀과 미켈란젤로

서기 79년, 로마제국에 한 학자가 죽기 직전 "전무후무한 걸작품이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발견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후, 1506년 한 농부가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뭔가 발견하는데,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 조각품인 ‘라오콘 군상(Laocoon and His Sons)’이었다. 현재 ‘라오콘 군상’은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높이 2.4m의 대리석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 성으로 진입하려던 그리스 군의 목마를 막아 신의 노여움을 산 라오콘이 두 아들과 함께 뱀에게 몸이 감겨 죽는 형벌을 받는 다는 신화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유물로 손꼽힌다.

(출처 - MBC신비한TV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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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이 ‘라오콘 군상’을 처음 땅속에서 발견한 농부는 한 조각가를 찾아가는데, 그 조각가는 뜻밖에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03.06~1564.02.18)’였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으로 ‘피에타 조각상(Pieta)’, ‘천지창조(Genesis)’,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등을 제작한 조각가이자 화가이다. 그는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가는데 ‘미켈란젤로’는 깜짝 놀란다. 그곳은 1세기경 로마제국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Major, 23~79.08.24)’가 전무후무한 걸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에스퀼리노 언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곳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모습 그대로의 ‘라오콘 조각상’이 묻혀있었던 것이다. 이 ‘라오콘 군상’은 여러 곳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경 그리스 로도스 섬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와 ‘아테노도로스’ 그리고 ‘폴리도로스(Polydoros)’가 공동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어지는데, 결국 1400여 년 전 ‘대 플리니우스’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라오콘 군상’은 헬레니즘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2005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린 캐터슨’에 의해 놀라운 주장이 제기된다. ‘라오콘 군상’이 기원전 1세기 경 제작된 것이 아닌 위조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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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오콘 군상’은 발견 당시부터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어 왔었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 땅에 묻혀있었음에도 부식도 되지 않은 채 너무 말끔하다는 것과 ‘대 플리니우스’의 예언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에 ‘린 캐터슨’교수는 오랫동안 ‘라오콘 군상’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고 실제로 그리스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위조품을 제작한 것이 ‘미켈란젤로’라는 것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라오콘 군상’을 제작해 ‘에스퀼리노 언덕’에 묻었고 농부와 짠 뒤 마치 오래전 제작된 작품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자작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 세계 미술계가 뒤집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첫 번째 근거로, ‘미켈란젤로’의 집에서 발견된 스케치를 들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남성의 상반신 뒷모습 스케치는 ‘라오콘 군상’이 발견되기 4년 전 그려진 것인데 그 모습이 ‘라오콘 군상’과 흡사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미켈란젤로’가 ‘라오콘 군상’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미켈란젤로’의 거래 기록이었다. 1498년부터 1501년까지 ‘미켈란젤로’가 다량의 대리석을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때 구입한 것이 바로 ‘라오콘 군상’과 같은 종류의 대리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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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발견당시 ‘라오콘 군상’은 7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것이 ‘미켈란젤로’가 커다란 조각상을 ‘에스퀠리노 언덕’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통에 조각상은 큰 대리석을 깍아 하나의 완성품을 만드는데 2.4m의 조각상을 만들어 비밀리에 ‘에스퀼리노 언덕’으로 옮겨야 했던 ‘미켈란젤로’는 7개의 조각으로 나눠 각자의 부분을 조각한 뒤 ‘에스퀼리노 언덕’으로 옮겨 땅속에 묻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496년 무명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잠자는 큐피드’라는 작품을 직접 제작한 뒤 친구와 함께 유적에서 발굴한 것처럼 속여 로마의 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에 큰 돈을 받고 팔아넘긴 이력이 있었다. 훗날, ‘미켈란젤로’의 이런 사기행각을 드러났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조각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로마에 입성해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Repubblica Fiorentina)'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던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의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을 소유하고 싶어 했고 이를 알고 있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03.06~1564.02.18)’는 작품 활동을 유지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라오콘을 직접 조각해 유물로 꾸몄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린 캐터슨’에 이러한 주장을 신뢰할 수 없다며 반박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라오콘 군상(Laocoon and His Sons)’이 다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과 유사점이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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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러시아 미스테리홀은 씽크홀? 핑고?

2014년 7월, 러시아의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상이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이 영상은 시베리아 하늘을 날고 있던 한 헬리콥터 조종사가 촬영한 것인데, 이 영상에는 시베리아 초원 한 가운데 정체불명의 거대한 구멍이 찍혀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구멍은 러시아 시베리아 북쪽 끝에 위치한 ‘야말’지역으로(‘야말’은 토착민 언어로 ‘지구의 끝’이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평균 기온이 영하 50도에 달하고 한겨울에는 햇빛을 거의 볼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가진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출처 - mbc 신비한tv서프라이즈)

이곳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이 거대한 구멍은 지름이 100m에 달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싱크홀(sinkhole)’ 중에서 가장 컸으며, 거대한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구멍 주변의 토양은 말라있었다. 이 영상이 공개된 후 이 구멍은 시베리아의 ‘미스테리 홀’이라 불리며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는데, 특히 이 ‘미스테리 홀’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거대한 ‘미스테리 홀’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싱크홀(sinkhole)’은 아무런 예고 없이 발생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집어삼키기 때문에 ‘싱크홀(sinkhole)’은 발생 시 어마어마한 굉음을 동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야말’지역의 ‘미스테리 홀’은 생성될 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일부사람들은 ‘미스터리 홀’이 누군가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종종 이슈가 되기를 바라고 의도적으로 만든 ‘싱크홀(sinkhole)’‘미스터리 서클’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하루아침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구멍이 너무 크다며 반박했다. 그러자 또 다른 일각에서는 ‘미스테리 홀’이 단순한 운석 충돌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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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운석은 지면과 충돌 시 거대한 충격음을 발생하지만, 지표면에 도달할 때까지 고속/고온을 유지하고 있는 일부 운석들은 소리 없이 순식간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운석의 충돌이라면 구멍 주변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석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반박 주장이 제기 된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대학에 극지방 과학 연구원 ‘크리스 포그윌’박사가 ‘미스테리 홀’‘핑고(pingo)’의 잔해라고 주장한다. ‘핑고(pingo)’는 얼음이 흙으로 덮여있는 장소를 뜻하는데, 북극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핑고(pingo)’가 매우 커진 상태에서 기후 변화로 인해 기온이 높아져 내부에 얼음이 녹으면 거대한 구멍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 당국은 북극연구센터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소속 연구관들을 야말 지역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얼마 후, 결과를 발표하는데, ‘핑고(pingo)’는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구멍이기 때문에 내부에 흙이 무너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야말의 ‘미스테리 홀’은 아래로 무너져 내린 듯 한 형태가 아니라 주변에 흙이 쌓여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무언가가 분출되어 생긴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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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은 생성원인을 지하가스 폭발이라고 발표했다. 실제로 이 ‘미스테리 홀’ 부근은 러시아에서 천연가스 매장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미스테리 홀’을 최초로 발견한 헬기 역시 인근에 위치한 가스회사의 소속이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온도 변화로 인해 가스층이 자연적으로 폭발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최종 결론짓는다. 하지만, 곧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극지방 연구센터의 연구자인 ‘플레하노프’가 단독으로 ‘미스테리 홀’의 조사를 진행하는데, 놀랍게도 러시아 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미스테리 홀’에서 가스가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구멍에 생성원인은 또 다시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야말 지역에서 ‘미스테리 홀’이 발견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구멍들이 연이어 발견됐다. 새로 발견된 구멍들은 각각 시베리아 ‘타즈’지역과 ‘타이미르’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각각 지름이 15m, 4m로 야말 지역의 구멍보다 작은 크기였지만 모양은 깔때기 모양으로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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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원인을 모른 채 늘어나는 ‘미스테리 홀’에 주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발 아래 구멍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의혹은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급기야 UFO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시베리아는 유독 UFO가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2011년 3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주’에서는 UFO가 추락했다는 주민들의 제보가 빗발쳤고 이에 경찰과 소방관들이 긴급 출동하고 재난당국이 헬기를 동원해 수색작업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2012년 3월에는 시베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 길이 180cm, 무게 200kg의 정체불명의 금속 물체가 추락했는데, 거대한 돔 형태 때문에 UFO의 잔해로 추정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로 봤을 때 ‘미스테리 홀’ 역시 UFO가 불시착한 흔적이거나, 고대 외계인들이 만들어 놓았던 지하기지가 빠져나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미스테리 홀’을 보면 뭔가가 빠져나간 듯 단면이 90도로 깎여 있었다. 이처럼 무수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에도 ‘미스테리 홀’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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